갈수록 고조되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으로 불안감을 느낀 인도·태평양 국가들이 앞다퉈 군사력 증강에 나서고 있다.
한반도는 물론, 동남아시아와 호주, 인도에 이르기까지 인도·태평양 권역 전체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 수준의 군비 경쟁에 돌입해 근미래에 다가올지도 모를 전쟁을 대비하고 있다.
◇신규 무기 실험에 천문학적 규모의 무기 계약까지
2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오랜 갈등과 당장의 위험에 직면한 아시아와 태평양이 불안감에 전투태세를 가다듬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12일 오전 북한은 함경남도 신포 앞바다에서 신규 무기 잠수함발사순항미사일(SLCM) 2발을 쏘며 국제사회를 위협했다.
다음날인 13일에는 호주가 미국과 영국과 함께 체결한 안보협의체 오커스(AUKUS)의 일환으로 약 2000억 달러(약 260조원) 규모의 핵추진 잠수함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 또 미국과 약 220기의 토마호크 미사일 구입 계약 체결을 검토 중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포인트 로마 해군기지에서 열린 오커스(AUKUS) 정상회의를 마치고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와 핵 추진 잠수함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
평화주의 헌법에 묶인 일본도 미국산 토마호크 미사일 수백발을 들여온다고 발혔으며 미국은 대만이 중국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고슴도치’ 역할을 하도록 무기 제공을 그 어느 때보다 늘리고 있다.
인도는 일본과 베트남과 함께 공동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말레이시아는 한국산 초음속 전투기 FA-50 18대 수입 계약을 체결했다. 인도네시아는 최소 2억 달러(약 2622억원) 규모의 인도-러시아 합작 ‘브라모스’ 초음속 순항미사일 구매 검토에 들어갔다.
또 필리핀은 지난달 2일 미군이 필리핀 내 주요 군사기지 4곳에 대한 접근·사용 권한을 추가로 확보하는 것을 허용한 뒤 미국과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에 돌입하고 남중국해에서 6년 만에 공동 해상 순찰을 재개했다.
스웨덴 싱크탱크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00년 아시아와 태평양 국가들이 전 세계 국방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7.5%에 불과했지만 2021년에는 27.7%(북한 제외)를 급증했다.
러시아의 발틱함대 소속 초계함 야로슬라프 무드리가 28일(현지시간)호르무즈 해협 인근 오만해와 인도양에서 사상 처음으로 중국, 이란과 3개국 해군 합동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
◇커지는 中 패권…대만해협 긴장고조에 군비경쟁
NYT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전개하려는 중국의 군사위협 수위 고조가 인도·태평양 군비 경쟁의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NYT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을 아시아와 태평양의 패권국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남중국해를 장악하며 ‘잃어버린 영토’로 간주하는 대만을 중국 통제하에 두는 목표를 명확히 했다”고 봤다.
중국은 지난해 대만해협에 전례없는 규모의 군용기를 배치하며 역내 긴장감을 끌어올렸고 낸시 펠로시 전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대한 반발로 대규모 고강도 실사격 훈련에 돌입하기도 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도 중국이 2027년까지 대만을 침공할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으면서 불안감은 더욱 고조되는 분위기다.
약 3500㎞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도와 중국도 영유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2020년 6월 북부 라다크 지역 국경지대 갈완계곡에선 몽둥이를 든 중국군과 인도군이 충돌해 인도군 20명과 중국군 4명이 숨지기도 했다.
남중국해에서도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달 6일 중국 함정이 군용 물자 보급작전을 진행하던 필리핀 선백에 레이저를 쏴 선원들이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로미어 브라우너 필리핀군 중장과 미 육군 제 1군단 사령관 자비에르 브룬슨 중장이 연례 합동 훈련인 살락닙(Salaknib)에서 함께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2023.03.13/뉴스1 © 로이터=뉴스1 © News1 김민수 기자 |
◇美 지원에 대한 의구심…독자적 안보체계 구축 노력도
한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국의 군사지원에 대한 의구심 역시 군비경쟁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이 지난해 2월부터 우크라이나에 300억달러(약 39조4000억원) 이상의 무기를 지원하는 등 천문학적인 돈을 쏟은 탓에 인도·태평양 지원에 힘쓸 여력이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또 미국과의 밀월이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중국의 경제·군사적 보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 역시 한몫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과 남중국해에서 치열한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베트남의 경우 외교 관계 격상에 공들이는 미국과 공조하면서도 중국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망설이고 있다.
중국 역시 군사력을 꾸준히 증강해 미국이 더는 중국을 압도하지 못한다는 불안감도 작용한다. SIPRI 자료에 따르면 중국 연간 국방지출은 2000년 220억 달러(약 28조원)에서 최근 3000억 달러(약 390조원)으로 급증했고 이미 중국 해군력이 함대 규모는 물론 생산 능력에서도 미국을 앞서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NYT는 “많은 국가들이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에도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반격할 수 있다는 여력과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고 전했다.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도발에 대비하고 평양 수뇌부 타격을 목표로 한 한·미 양국군 훈련에 미국 핵 추진 잠수함 노스캐롤라이나호가 참여했다. (미 해군 홈페이지) 2016. 2.15/뉴스1 |
◇역내 긴장 심화하는 군비경쟁 악순환
하지만 이처럼 미중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한 군비 경쟁이 결국 인도·태평양 국가들 간의 경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는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이 군비증강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북한·중국·러시아가 이를 한목소리로 비난하고 있으며 한국 역시 과거 식민 지배 역사로 인해 우려하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인도네시아 역시 호주의 핵잠수함 도입 결정이 역내 핵무기 확산에 일조하고 있다며 비난에 나서기도 했다.
NYT는 “그동안 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엔진’으로 부상하며 유럽과 미국 등의 제조업 허브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50년만에 미중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