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대법원이 29일(현지시간) 지난 45년간 합헌으로 판단해 왔던 대학입학시 흑인 및 라틴계 등 소수인종에 대한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어퍼머티브 액션)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리면서 미국 사회가 또다시 술렁이고 있다.
이번 대법원의 결정은 대학입학을 넘어 기업들의 채용 등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또한 이번 판결은 ‘6 대 3’의 보수 절대 우위 구도의 현 연방대법원 지형을 또다시 확인시켜줬다는 점에서 미국 사회의 이념 대결의 재현은 물론 대법원 구성을 둘러싼 논란도 재차 불러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 다수 “인종 아닌 개인 경험 평가”…소수 “중대한 진전 역행”
대법원은 이날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Students for Fair Admissions)’이 소수인종 우대 입학 제도로 백인과 아시아계 지원자를 차별했다며 노스캐롤라이나대와 하버드대를 상대로 각각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각각 6대 3, 6대 2로 위헌을 판결했다.
이로써 연방대법원이 지난 1978년 ‘인종을 입학 사정 과정에서 여러 요인 중 하나로 고려하는 것은 합헌’이라고 판단한 이후 45년간 유지돼 왔던 판례를 뒤집으면서 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전망이다.
대법원 다수 의견은 대학 입시 때 “학생은 인종이 아닌 개인으로서 경험에 근거해 평가돼야 한다”는 입장을 폈다.
다수 의견을 집필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판결문에서 이같이 밝힌 뒤 “많은 대학이 너무 오랫동안 그 반대로 행해왔고, 이에 따라 개인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도전과 교훈, 기술이 아니라 피부색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 두 대학의 입학 프로그램이 “인종을 사용할 만큼 충분히 객관적이지 않으며, 불가피하게 인종을 부정적 방식으로 이용했고, 인종에 대한 고정 관념과 연관돼 있다”고 지적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다만 “이 의견이 인종 문제가 지원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지원자의 주장 자체를 고려하는 것에 대한 금지로 해석돼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미국 연방대법관들이 지난해 10월7일 연방대법원에서 단체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2022.10.07. © 로이터=뉴스1 © News1 김현 특파원 |
반면 노스캐롤라이나대 판결에서 소수 의견을 집필한 잭슨 대법관은 이번 대법원의 결정이 인종 관계에 대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다수의 관점에서 말할 수 있는 최선은 인종에 대한 배려를 막는 것이 인종차별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희망으로부터 (현실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그것이 동기라면 대다수는 헛되이 진행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브라운 잭슨 대법관은 “만약 이 나라의 대학들이 중요한 것을 무시하도록 요구받는다면 그것(인종 차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종차별이 사라지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궁극적으로 인종을 무시하는 것은 이를 더 중요하게 만들 뿐”이라고 비판했다.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도 하버드대 소수 의견에서 이번 판결이 “수십 년의 판례와 중대한 진전을 역행한다”면서 “대법원은 교육에 있어 인종 불평등을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민주주의 정부와 다원주의 사회의 근간인 평등 보호에 대한 헌법적 보장을 뒤집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고착된 인종 불평등은 오늘날 여전히 현실로 남아 있다”면서 “인종을 무시하는 것은 인종적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평등을 위해선 불평등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 연방대법원이 29일(현지시간) 대학 입학시 소수인종 우대정책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결정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 2023.06.29. © 로이터=뉴스1 © News1 김현 특파원 |
◇’케네디의 유산’ 어퍼머티브 액션…킹 목사 암살 사건이 전환점
어퍼머티브 액션은 미국내 흑인 인권운동이 활발했던 1961년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 직후 고용평등위원회를 만들고 ‘연방정부와 계약한 업체가 직원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인종과 국적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등장한 정책이다.
이어 후임인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5년 ‘연방정부가 직원을 고용할 경우 인종과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국에 차별받지 않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는 강화된 내용을 담아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는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던 흑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후 이 정책은 미국 원주민과 히스패닉 등 다른 소수 인종과 여성 등으로 확대됐고 교육에서도 적용됐다.
특히 대학 입학과 관련해선 1968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 사건이 전환점이 됐다. 킹 목사의 암살 사건 후 학생들은 대학들이 미국 사회를 더 대표하기 위한 노력을 배가하도록 압박했고, 킹 목사의 사망 4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하버드대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흑인 학생들을 선발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실제 1969년 하버드대에 입학한 흑인 학생 수는 급증했다. 당시 1202명의 신입생 중에서 흑인 학생수는 90명으로, 직전해(1968년) 51명에서 76%나 증가했다. 예일대와 프린스턴대 등 명문 대학들의 노력도 강화됐다.
그러나 대학 입시에서 자신보다 성적이 낮은 소수인종 경쟁자에게 밀린 백인 학생들의 불만이 계속 누적됐고, 소수 인종이지만 높은 교육열로 성적이 좋은 아시아계 학생들은 입학 사정시 ‘인종별 입학정원 상한’ 등에 묶여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간 미 대법원은 1978년 인종을 입학 사정 과정에서 여러 요인 중 하나로 고려하는 것은 합헌이라고 판단한 뒤 2003년과 2016년 헌법소원 사건에서도 동일한 입장을 유지했다.
하지만 1995년 캘리포니아를 시작으로 미시간·플로리다·애리조나 등에서 주(州)헌법 개정 등을 통해 어퍼머티브 액션을 금지하는 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연방대법원은 2014년 어퍼머티브 액션을 금지하는 주들의 조치가 평등권 위반이자 차별이라는 취지의 소송에서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NYT는 “대법원의 이번 결정으로 케네디 대통령이 칼리지와 대학에 적용했던 어퍼머티브 액션의 유산이 막을 내리게 됐다”고 평가했다.
NYT는 또 다른 기사에서 “이번 판결은 전국 칼리지와 대학들이 그들의 입학 관행을 재검토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넘어 재계의 다양성 노력에도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미국 연방대법원의 대학 입시에서 흑인 및 라틴계 등 소수 인종에 대한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 위헌 판결을 비판하고 있다. 23.06.29 © 로이터=뉴스1 © News1 김예슬 기자 |
◇바이든 “정상적 법원 아냐”…트럼프 “美 위해 훌륭한 날”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미 정치권과 각 진영은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등 민주당과 진보 진영은 강력 반발하고 있는 반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등 공화당과 보수 진영은 환영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을 통해 대법원의 결정을 “강력히 반대한다”면서 “이것은 정상적인 법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다양성을 보호하고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대학이 지원자를 선발할 때 학생들이 극복한 역경을 고려하도록 하고, 해당 대학들에 대해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내용이 담긴 조치를 발표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성명을 내고 “어퍼머티브 액션이 더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추진에 있어 결코 완전한 답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핵심 기관으로부터 조직적으로 배제됐던 여러 세대의 학생들에게 우리도 테이블에 앉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줬다”며 “대법원의 결정을 계기로 우리의 노력을 배가시킬 때”라고 말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 미디어인 ‘트루스 소셜’에 글을 올려 “미국을 위해 훌륭한 날이다. 이번 판결은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고 바라던 판결”이라며 “우리는 완전한 성과 기반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말했다.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도 트위터에 “대법원은 인종 때문에 어떤 미국인도 교육 기회를 거절당해선 안 된다고 판결했다”면서 “이제 학생들은 동등한 기준과 개인의 장점을 바탕으로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대학 입학 절차를 더 공정하게 만들고 법에 따른 평등을 보장할 것”이라고 적었다.
지난해 5월14일(현지시간)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보장한 기존 판결을 파기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워싱턴 기념탑 주변에서 낙태권 폐지 반대하는 시위대가 집회를 하고 있는 모습.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
◇’보수 우위’ 연방대법원 이념 지형 재확인…대법관 제도 논란 재촉발
이번 판결은 보수 우위 이념 지형의 연방대법원의 구조를 재확인시켰다는 점에서 연방대법원을 둘러싼 논란이 재촉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민주당 등 진보진영에선 현재 9명의 대법관 정원을 확대하는 것을 비롯해 한 번 임명되면 ‘종신직’인 현재의 대법관 임기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은 지난 25일 MSNBC에 출연해 “대법관에게도 임기가 필요하다”며 한 번 인준을 통과하면 주기적 선출이나 윤리 심사 없이 종신직을 유지하는 대법관제도에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펠로시 전 의장은 대법관 확대에 대해서도 “링컨 대통령 시절 대법관을 9명으로 늘린 지 150년이 지났다”며 “이 문제는 집회에서 외치는 사안이 아니라 토론돼야 할 주제”라고 말했다.
이에 맞서 트럼프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은 보수 대법관 3명을 임명하는 데 역할을 해 “영광”이라며 “대통령이 되면 워크(Woke·공화당은 ‘진보 정체성 강요’라는 의미로 사용)와 진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법을 비틀지 않고 엄격히 적용하는 대법관들을 계속 임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번 판결이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게 승리를 안겨줬던 ‘로 대 웨이드’ 판결과 동일한 파급력을 낳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해 연방대법원은 반세기동안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했던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폐기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에 여성 유권자들이 강력 반발하면서 같은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어퍼머티브 액션에 대한 인종별 입장차가 다른 데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 민감한 ‘대학 입시’ 문제라는 점에서 이념적 파급력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와 관련, 유고브가 지난 4월 5~11일 미국 성인 2029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사립 대학에서 인종을 입학 요소로 사용해야 하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69%가 ‘사용할 수 없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답변은 31%에 그쳤다.
같은 설문에서 ‘공립 대학’과 관련한 질문에 응답자의 74%가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26%만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