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이달 하순 방미를 앞두고, 미국 CIA(중앙정보국)가 한국을 포함해 동맹국들의 우크라이나 살상 무기 지원 관련 논의를 감청한 정황이 드러나 논란이 예상된다. 우리 정부는 이에 과거 전례를 살펴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해나갈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미국 국방부의 기밀 문서가 SNS에 다량 유출됐고 일부 유출 문건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 무기 지원 논의와 관련해 동맹국들을 감청한 정황이 담겼다고 뉴욕타임스(NYT)가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해당 문건들은 최근 텔레그램, 트위터 등을 통해 사진 형태로 대량 유포됐는데 이중 한국 고위 관료들의 전화와 메시지 등도 담겼다.
최소 2건의 문서에 살상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기고 한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서 사용할 미군 포탄을 제공할지에 대한 내부 논의가 담겨 있다고 NYT는 보도했다.
특히 NYT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전화해 물품(무기)를 전달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을 한국 관리들이 우려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고 부연했다.
지난해 11월 한국이 미군에 155㎜ 포탄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사실이 알려진 것과 관련,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 한국으로부터 미군이 포탄을 구매해 자국의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보내는 식으로 재고를 충당한다는 의혹이 불거져왔다.
미국 CIA가 작성자인 문건 내용 중에는 정보 출처를 ‘신호 정보 보고'(시긴트·signals intelligence report)라고 명시, CIA가 한국 정부의 내부 논의를 감청했음을 보여주는 대목도 나온다고 NYT는 했다.
시긴트는 전자 장비로 취득한 정보로, CIA가 도·감청한 내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과 관련해, 동맹국인 한국 정부의 동향도 자세히 살폈다는 점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155mm 포탄 준비하는 우크라이나 군인 © AFP=뉴스1 © News1 이승아 기자 |
◇ NYT “문건 유출, 韓 등 동맹 외교 부정적 영향”
유출 문건을 통해 러시아군의 공격 시기와 특정 목표물까지 매일 실시간으로 미국 정보기관에 전달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런 정보를 미국이 전달해준 덕에 우크라이나가 중요 전기마다 방어태세를 충분히 갖춘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NYT는 전했다.
한국 뿐 아니라, 영국과 이스라엘 등 다른 동맹국들에 대한 내용도 상당수 이번 유출 문건들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 6일 NYT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비밀리에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지원 계획이 담긴 기밀문건이 SNS를 비롯해 극우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포챈(4chian) 등에서 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출 문건엔 서방의 우크라이나군 증강과 무기 보급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해 우크라이나군의 부대·장비·훈련 목록 등이 담겨 논란이 됐는데, 이후 또다시 유사한 기밀 문건 유출 사태로 당분간 논란은 지속될 전망이다.
NYT는 “유출 문건들은 미국이 러시아뿐 아니라 다른 동맹국에 대해서도 첩보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며 “이미 동맹국들과의 관계가 복잡해졌고, 미국의 비밀 유지 능력에 대한 의구심마저 자아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사실이 공개되면서 “한국과 같은 주요 파트너 국가와의 외교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고 NYT는 분석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14회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요구권(거부권)을 의결했다. (대통령실 제공) 2023.4.4/뉴스1 © News1 오대일 기자 |
◇ 美 당국, 유출 경위 조사…韓대통령실 “과거 전례 살펴볼 것”
한 서방 국가의 고위 관리는 이번 유출 사태에 대해 “고통스러운 유출”이라며 “여러 정보기관이 서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비밀이 유지될 것이라는 신뢰와 확신이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향후 미국과의 정보 공유에 있어 신뢰가 보장되지 않는 한, 제한을 둘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NYT에 따르면 이번에 유출된 문건은 총 100쪽에 이르며, 미 국가안보국(NSA)·중앙정보국(CIA)·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등 정부 정보기관 보고서를 미 합동참모본부가 취합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유출 문건들은 정보보고 형식으로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과 마크 밀리 합참의장에게 1일 보고됐다고 NYT는 보도했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 보도에 따르면 해당 문건들은 게임 채팅 플랫폼 ‘디스코드’에 먼저 나타나기 시작했고 온라인 커뮤니티 ‘4chan’ 등에 유포된 후 텔레그램과 트위터 등으로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수 고위 관리는 문서가 완전히 위조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백악관, 국방부, 국무부 등에 제출되는 CIA ‘세계 정보 리뷰’ 보고서와 형식이 유사하다고 말했다고 WP는 전했다.
미국 법무부는 국방부와 공조해 유출 경위 수사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우크라이나군의 계획과 관련한 정보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만 밝히며 분위기를 주시하는 모양새다.
한편 우리 정부는 이날 과거의 전례,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검토해 대응책을 살펴보겠다며 신중한 입장을 내놨다.
대통령실은 이날 “과거의 전례,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검토해 대응책을 한 번 보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관련 외신 보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제기된 문제에 대해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할 예정”이라며 이같이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