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사흘 안에 우리 데리러 안 오면 그들이 우리를 입양할 거래요….”
열두 살 난 마트비가 수화기 너머 아빠에게 마지막 SOS를 보냈다. 마트비는 지난해 동생들과 함께 마리우폴에서 950㎞가 넘게 떨어진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기숙 학교로 끌려갔다.
마트비는 90일간의 생이별 끝에 자원봉사 단체의 도움을 받아 겨우 아빠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고, 수천명의 우크라이나의 어린이들이 강제로 러시아로 끌려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ABC뉴스는 점령지에서 아이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러시아 군인들의 손에 강제로 끌려가는 아이들의 실상을 보도했다.
러시아에 침공당한 지역의 아이들은 우크라이나가 땅을 탈환해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러시아 군 퇴각 때 아이들을 데려가기 때문이다.
◇ 러시아에 유괴된 아동 6000여 명, 친러 교육시설 강제 수용
보도에 따르면 아이들을 데려가는 과정은 ‘계약’의 탈을 쓴 ‘유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 점령군이 총칼로 위협해 우크라이나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경우에 따라 아이들의 보호 자격을 익명 대리인에 넘긴다”고 서명해야 했다.
유괴된 아이들은 러시아 본토에 있는 ‘재교육 및 입양 시설’로 들어간다. 미국 국무부가 지원하는 분쟁관측소는 지난 14일 보고서를 통해 우크라이나 출신 아동 최소 6000명이 해당 시설에 강제 수용됐다고 밝혔다.
이같은 강제 아동 이송 및 부모에게 아동을 돌려보내지 않는 행위 등은 모두 국제인도법 및 인권법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
미국 분쟁 관측소와 예일대 인도주의 연구실(HRL)이 찾아낸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 아동 수용 시설의 위성 사진. (출처 : 분쟁 관측소) |
아이들이 유괴되고 있다는 증거는 위성 사진으로도 나타났다. 분쟁관측소와 예일대 인도주의 연구실(HRL)은 지난해 2월 개전 이래 초고해상도 위성 이미지 등을 분석해 우크라이나 아동을 수용하는 시설 43여 곳을 파악했다.
‘방학 캠프’라는 미명 하에 이곳에서는 아이들을 친러시아 성향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 세뇌 교육이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HRL은 시설 중 78%가 러시아 중심의 학업, 문화, 애국심, 군사 교육 등 프로파간다적인 ‘통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시설 중 2곳은 아동 20여 명을 러시아 가정에 강제 입양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 “아동 유괴, 강제 추방은 대학살 의도”…정체성까지 파괴
어린이가 전쟁과 무슨 관련이 있어 이들을 유괴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전쟁 상황에서 아동을 유괴하거나 본토에서 강제 추방하는 행위는 단순한 심리전 이전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범죄를 조사하는 웨인 조다시 변호사는 ABC에 “아동 강제 추방은 대량학살(제노사이드) 의도를 증명할 때 근거로 인정되는 행위”라면서 죽이지만 않았지 사실상 대량학살같은 행위라고 말했다.
1948년 채택된 집단학살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 제2조에 따르면 국가·민족·인종·종교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파괴할 목적으로 아동을 강제 이동시키는 행위는 집단학살에 해당한다.
한 공동체의 관행과 전통을 파괴해 아이들의 뿌리를 자르는 행위는 목숨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본 것이다.
키이우 시민자유센터의 알렉산드라 로만초바는 워싱턴포스트(WP)에 “러시아는 최대한 빨리 아이들을 러시아 가정에 넘기기 위해 입양법까지 바꿨다”고 고발했다.
이어 “(러시아 가정으로 입양된) 아이들은 진실을 모른 채 우크라이나인으로서 성장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성토했다.
◇ 국제사회, 러시아 아동 유괴 실태조사 착수
현재 러시아가 유괴한 우크라이나 아동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유엔 난민기구(UNHCR)는 러시아 체재 중으로 알려진 우크라이나 난민 약 300만 명 중 아동이 몇 명인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VOA 보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정부 고위 관계자는 1만4000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러시아군에 유괴됐다고 밝혔다. CNBC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아동 26만 명이 러시아로 추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9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EU 특별 정상회의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
현황 집계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이 심각한 사태에 유럽연합(EU)과 유엔이 공동 대응에 나섰다.
27일 EU 집행위원회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마테우슈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 주도로 우크라이나 아동 유괴 실태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착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다나 스피난트 EU 집행위원회 부대변인은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이자 비극이며 범죄”라며 “관련자들이 법적 처벌을 받게 할 것”이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