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이 경쟁에 따른 반사 이익 수혜국으로는 일본이 꼽힌다.
23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미·중 갈등을 언급하며 “반도체 제조 부문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며 “이민이나 다른 수단으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일본은 반도체 제조 경쟁국으로 다시 자리매김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은 주요 7개국(G7) 정상들의 대중 견제 메시지에 대한 반발로 미국 최대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에 대해 구매 금지 조처를 내리는 등 미중 간 갈등은 심화되고 있는데 일본이 이 틈을 비집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앞서 G7 정상들은 지난 21일 공동성명을 통해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강조하고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대한 공동 대응 입장을 밝혔다. 이에 중국은 미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제재로 맞불을 놨다. 2019년 미국이 중국의 핵심 정보기술(IT) 업체 화웨이·ZTE에 부과한 제재와 유사해 미국의 대중 제재에 대한 보복 조치로 평가된다.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 산하 인터넷안보심사판공실(CAC)은 지난 21일 마이크론 제품이 중국의 중요한 정보 인프라 공급망에 심각한 보안 위험을 초래했다며 “중요한 국가 안보시설 운영자들은 제품 구매를 중지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0일 (현지시간) 일본 히로시마 그랜드 프린스 호텔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중 글로벌 인프라 투자 파트너십 행사에 참석을 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
WSJ은 “일본은 1980년대 반도체 제조 분야에서 지배적인 국가였지만, 이후 대만과 한국에 뒤처졌다”면서도 “일본은 여전히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요한 회사들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에는 이미지 센서용 반도체를 만드는 소니, 메모리 칩용 회사인 키오시아 등이 있다”며 “이러한 회사는 중국에서 벗어나 다각화하려는 기업들에 매력적인 목적지가 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실제로 일본은 1980년대 말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51%를 차지하며, 미국을 역전했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전 세계 반도체 회사 상위 10개사 중 6개가 일본 기업일 정도였다.
그러나 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일본의 2021년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9%에 그친다. 반면 일본 반도체 부가가치는 그 3배인 27%에 달한다. WSJ는 실리콘 웨이퍼에 감광성 물질인 포토레지스트를 코팅하고 현상하는 장비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체인 도쿄일렉트론 등이 이러한 부가가치 생산을 견인한다고 봤다.
또 고부가가치 반도체 회사들이 미중 경쟁을 기회로 삼아 반등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게 WSJ의 분석이다.
매체는 “이러한 고부가가치 회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령 인구와 주변 국가보다 높은 임금, 숙련된 엔지니어의 부족은 일본의 반도체 제조 부문 성장의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매체들은 일본의 반도체 업계가 최근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배경에 대해 △지정학적 리스크 고조 △반도체 부재(部材)·제조·검사 장치의 높은 경쟁력 △토요타 등 다수의 대기업 고객사 존재 △일본 정부의 보조금 지급을 들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와 관련해선 대만해협에서 전쟁 발생 위험이 고조되고 있고, 한반도에선 북한의 도발이 가중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최근 일본 내 반도체 산업 활성화를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18일 삼성전자, TSMC, 인텔, 마이크론 등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 수뇌부와 만나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촉구했다. 이날 마이크론은 일본 정부로부터 2000억엔(약 1조9300억원)의 보조금을 약속받기도 했다.
이 밖에도 대만의 TSMC는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県)에 공장을 짓는 데 이어 두 번째 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텔도 일본에 연구개발(R&D) 거점을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삼성전자 역시 일본에 R&D 전용 반도체 생산라인을 건설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