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보조금을 받는 반도체 기업에 초과이익을 반납하고 사업 기밀 공개까지 요구하는 ‘반도체 지원법’을 내놓으면서 반도체 업체들은 미국과 중국 가운데 이른바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강요받는 상황에 직면했다.
단순한 금전적 지원 이상의 의미가 있는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이 오히려 ‘족쇄’가 될 수 있지만 포기할 순 없고 생산기지가 있는 중국과 단절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다. 오는 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연례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미국을 상대로 ‘강대강’ 메시지를 내놓을 수도 있다.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온 우리 기업들로선 유불리 셈법이 더욱 복잡해진 것이다.
2일 반도체 업계 안팎에선 미국 상무부가 공개한 ‘반도체 지원법상 보조금 지원 계획’은 중국과의 디커플링(분리)에 협력하는 글로벌 기업에 보조금을 주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지원금은 미국이 주도하는 공급망 재편에 글로벌 기업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당근’처럼 보이지만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과 디커플링을 목표로 미국과 중국 중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채찍’에 가깝다.
이런 탓에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거나 계획했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미국이 제시한 50조원에 달하는 보조금은 단순히 세액공제나 금전적 지원에 그치지 않는다. 보조금을 받는다는 것은 미국의 공급망 재편에 동조한다는 뜻이다. 반면 보조금을 안 받는다는 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과 ‘반도체 동맹’을 포기하고 중국과 손을 잡고 투자를 이어가겠다는 의미가 된다.
업계에선 기업 영업기밀까지 원하는 미국의 요구 수준을 받아들이는 건 ‘득보다 실이 많다’라는 평가까지 나오지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은 “면밀한 검토를 하고 있다”며 공식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단순히 지원금 신청 유무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 재편, 외교적인 문제까지 줄줄이 연관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업계 관계자는 “돈이 아니라 결국 미국과의 관계 설정의 영역”이라며 “보조금을 무턱대고 받기도, 패싱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삼성전자는 17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고 SK하이닉스도 첨단 패키징 공장과 연구개발(R&D)센터 건설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무엇보다 삼성전자는 대만 TSMC와의 경쟁 때문에 미국 공장 설립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보조금을 받는 기업에 대해 10년간 중국 내 공장 신·증설과 장비 교체 투자를 할 수 없도록 막겠다고 나선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중국을 포기하기도 어렵다. 단순히 미국의 손을 잡고 중국 사업을 철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지만 실현 가능성은 떨어진다.
중국은 국내 반도체 수출의 약 40%를 차지하며 최대 소비 시장이자 우리 기업들의 메모리 반도체 생산 거점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을, 쑤저우에 패키징 공장을 두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우시에 D램 공장을, 충칭엔 패키징 공장을 가동 중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낸드플래시의 40%를, SK하이닉스는 D램의 50%를 중국에서 만든다. 중국 시장을 접게 되면 이 공장들도 장기적으로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미국의 대(對)중국 규제가 담긴 ‘반도체 지원법’과 맞물려 오는 4일 열릴 중국의 양회에서 나올 시 주석의 메시지에도 반도체 업계의 관심이 쏠려 있다. 업계에선 중국이 자국 반도체 지원을 앞세워 미국 투자 기업에 페널티를 주는 등 ‘강대강’ 대책이 나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시 주석은 지난해 10월 제20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기술 자립·자강’만 다섯 차례나 언급했다. ‘첨단 기술 분야에서의 독립’을 통해 미국의 디커플링 압박을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