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을 맞아 아픈 환자를 돌보며 항일 독립운동에 나선 의사들의 헌신적 노력이 재조명되고 있다. 사람 생명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직업적 특성이 사명감으로 표출돼 본연의 업은 물론, 광범위한 활동에 뛰어들 수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15일 한국의사100년기념재단에 따르면 의사(의학도 포함) 출신 독립운동가는 상당히 많다고 추정되나 국가보훈부 공훈 심사를 거쳐 훈격이 확정된 이는 최소 50명이다. 의사들의 독립운동은 의학교육이 결실을 맺으면서 한일합방 이전부터 시작됐다.
독립신문을 발간한 서재필 박사는 미국에서 의사가 된 뒤 귀국해 독립운동에 일조했다. 그는 1896년 신문을 창간했으며 독립협회를 만들고 민중 대상 근대화 운동에 나서면서 독립문을 만든 일 역시 한일합방 이전이었다.
서 박사는 구한말 개화사상을 편 민족 선구자로서 후세에 널리 알려졌지만, 활약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이도 많다는 게 재단 설명이다. 1919년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의사의 독립운동은 국내외 가릴 것 없이 본격화됐다고 한다.
재단은 “미국과 일본에서 단순 활동을 넘어 목숨을 걸고 저항하던 이들이다. 수적으로도 많고 활동은 광범위했다”면서 “사람의 생명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투철한 사명감으로 본연의 업에 정진했고 이게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연결됐을 것”이라고 전했다.
재단은 또 “이들은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일제의 폭압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의사 중의 의사, 대의(大醫)”라며 “의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조국의 현실을 깨닫게 됐을 것이다. 연민과 분노로 헌신했는데 지식인으로서 당연하면서도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소개했다.
이들 중 김필순 선생(1878~1919년)은 세브란스의학교(현 연세대 의과대학)를 1회로 졸업하고 국내 최초의 면허의사가 됐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뜻을 함께하며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한 그는 내몽고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독립운동 후방 기지를 개척했다.

신민회 회원인 주현칙 선생(1882~1942년)도 3·1운동으로 8년간 망명한 뒤 1927년 사재를 털어 평안북도 내 유일한 고아원인 ‘대동고아원’을 운영했다. 1942년에는 미국 선교사를 거쳐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낸 사실이 탄로돼 검거, 혹독한 고문을 당해 60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대구에서 동산병원을 열고 의료업에 종사하던 이범교 선생(1888~1951년)은 3·1운동에 참가한 뒤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에서 정보 교환 등 통신 업무에 치중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 수집 업무도 겸했다.
그뿐만 아니라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의료 활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한 세브란스의학교 출신 이태준, 세균학과 위생학 등 한국 공중보건학의 초석을 놓은 김창세, 여성운동에 앞장선 최정숙, 백정 신분을 넘어선 박서양 등도 있다.
재단이 파악하기로 의사 독립운동가의 활동 행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김필순 선생처럼 신민회 회원으로서 군의관이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한 유형이다.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면 병원에서 독립운동을 펼쳤고, 이곳을 거점으로 연락망을 형성했다.
아울러 중국 본토 등 국외에서 광복군 군의관으로 활동한 유형도 있다. 상해 의대 출신으로 광복군 활동을 하며 부상병 치료와 위생 관리 등 군내 의료 지원에 힘썼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주치의로 광복군 총사령부 군의처장을 지낸 유진동 등이 대표적이다.
재단은 “타국에서 병원을 열어 애국지사와 동포 건강을 돌보면서 수익금을 독립자금으로 아낌없이 지원한 인물들은 너무나 많았다”며 “의료사에 의사 독립운동가의 정신과 업적을 분명히 새기고 후대의 귀감으로 삼을 때”라고 첨언했다.
한편, 한국의사100년기념재단은 지난 2003년 대한의사협회(의협)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재단법인으로 출범돼 한국 의사가 향후 100년에도 국민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학술 활동, 계몽 홍보, 의료봉사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