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헌정 사상 최초의 흑인여성 연방대법관직에 오른 커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이 취임 1년을 맞았다.
최근 미 연방대법원이 소수인종 대입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어퍼머티브 액션)과 성 소수자, 학자금 대출 탕감 정책 등 각종 민감한 현안에서 보수적 판결을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잭슨 대법관의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잭슨 대법관은 지난해 초 진보 성향 대법관인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이 은퇴 의사를 밝히자 조 바이든 대통령이 ‘흑인 여성 대법관 지명’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과 맞물려 일찌감치 유력 후보로 거론됐다.
결국 잭슨 대법관은 지난해 2월 바이든 대통령의 지명을 받았고, 미 상원의 인준을 거쳐 지난해 6월30일 브라이어 대법관의 퇴임으로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대법관직에 올랐다.
잭슨 대법관의 지난 1년에 대해 미 언론들은 9명의 대법관 중 가장 늦게 취임한 ‘신출내기’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왔다고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3일(현지시간) ‘잭슨 대법관의 과감한 데뷔와 독립적 행보’를 제목으로 한 기사를 보도했고, NBC방송도 잭슨 대법관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 주저하지 않는 취임 첫 해를 보냈다”고 평가했다.
잭슨 대법관은 ‘6대3’으로 기울어져 있는 보수 우위의 연방대법원에서 다른 2명의 진보 성향 대법관들과 함께 ‘진보 블록’을 형성해 왔다.
최근 소수인종 대입우대 정책과 성 소수자 권리, 바이든 대통령의 학자금 대출 탕감 정책 등 연방대법원의 보수적 결정이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논쟁적 사건에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특히 최근 어퍼머티브 액션 위헌 판결 당시 같은 흑인인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과 정면충돌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토머스 대법관은 “모든 이가 법 앞에서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헌법 원칙에 따라야 한다”며 소수인종 우대정책에 반대했다.
토머스 대법관은 나아가 “인생의 거의 모든 결과가 주저없이 인종에 기인할 수 있다”는 잭슨 대법관의 견해를 겨냥, “노예제라는 원죄가 오늘날까지 우리 삶을 결정하며 여전히 인종차별 사회에 갇혀 있다는 시각으로 사물을 본다”고 비판했다.
예일대 로스쿨 출신인 토머스 대법관은 소수인종 우대 정책의 혜택을 입은 당사자지만, “억지로 짜맞춘 다양성은 현실을 왜곡한다”며 ‘인종 중심적 사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커탄지 브라운 잭슨 연방대법관이 30일(현지시간) 워싱턴DC 연방대법원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김현 특파원 |
이에 잭슨 대법관은 판결문 각주를 통해 “내가 작성하지 않은 반대 의견”에 대한 “공격”이라고 꼬집으며 “오늘 다수 의견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는 식의 무감각한 태도로 (법원의)결정으로 ‘모두를 위한 인종차별 철폐’를 선언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하지만 법적으로 인종이 무관하다고 해서 삶에서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면서 “‘인종에 대해 더 생각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미국의 잠재력을 줄곧 가로막은 인종 간 격차라는 ‘방 안의 코끼리’에 눈 감으려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잭슨 대법관은 또 지난 1년간 선배 대법관들의 과묵함과는 달리,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WP는 잭슨 대법관에 대해 “열정적인 질문자”라고 평가하면서 적어도 지난 30년간 그 어떤 신임 대법관보다 구두 변론에서 자주 발언했다고 전했다.
NBC 등에 따르면 잭슨 대법관은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말을 했는데, 단어수를 기준으로 변론 중 발언을 많이 하는 것으로 유명한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보다 변론당 평균 600단어를 더 많이 말한 것으로 분석됐다.
잭슨 대법관은 때때로 엘레나 케이건, 소토마요르 등 진보 블록관들과 결이 다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잭슨 대법관은 지난 1일 대법원이 레미콘 판매 및 운반회사인 글레이셔 노스웨스트가 노조의 파업에 따른 손실보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결했을 당시 “파업할 권리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며 9명의 대법관 중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냈다.
지난 5월 밀폐된 공간에서 사육된 돼지로 만든 돼지고기 제품을 금지하는 캘리포니아주의 동물복지법에 대한 위헌 소송에서 ‘5대4’로 대법원이 합헌 결정을 내렸을 당시 ‘다수’ 의견에 섰던 2명의 다른 진보 대법관들과 달리 보수 성향 대법관 3명과 함께 “과도한 간섭”이라는 취지로 양돈업자들의 편에 서기도 했다.
비록 잭슨 대법관이 굵직한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시각을 대변하는 반대 의견으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지난 1년간은 약 84%의 사건에서 다수 의견에 섰다고 미 언론들은 분석했다.
이는 소토마요르(82%), 케이건(80%) 등 다른 진보 대법관은 물론 보수 성향인 토머스(76%), 닐 고서치(82%), 사무엘 엘리토(80%) 대법관보다 높은 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