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주가 삼성전자와 LG전자를 포함한 글로벌 TV 제조사 5곳을 상대로 “소비자 동의 없이 안방을 감시하고 데이터를 팔아넘겼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스마트 TV에 탑재된 ‘자동 콘텐츠 인식(ACR)’ 기술이 0.5초마다 화면을 캡처해 민감한 개인정보를 무단 수집했다는 혐의다. 이번 소송은 ‘스마트 라이프’의 편리함 뒤에 숨겨진 데이터 주권 침해 문제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어 파장이 예상된다.
미국 지역방송 KVUE와 스트리밍 전문매체 더스트리머블 등 외신은 켄 팩스턴 텍사스주 법무장관이 16일(현지시각) 삼성전자, LG전자, 소니, 하이센스, TCL 등 5개사를 상대로 주 법원에 소송을 냈다고 보도했다.
“거실에 설치된 감시카메라”… 0.5초 단위 캡처의 공포
팩스턴 장관은 소장에서 이들 기업이 소비자를 기만하여 ACR 기술을 활성화하도록 유도했으며, 이를 통해 텍사스 주법을 위반했다고 명시했다. 그는 이번 사안을 두고 “미국 가정의 거실에 설치된 대규모 감시 시스템”이라고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소장에 따르면 문제가 된 ACR 소프트웨어는 사용자의 TV 화면을 0.5초마다 캡처하여 실시간으로 시청 활동을 감시한다. 문제는 이 기술이 단순히 시청 중인 프로그램 정보만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TV 화면에 나타나는 모든 정보를 인식하기 때문에, 사용자가 TV와 연결된 기기를 통해 입력하는 비밀번호나 금융 정보 등 민감한 개인정보까지 유출될 위험이 크다고 법무장관실은 지적했다.
팩스턴 장관은 성명을 통해 “이 기술은 기만적이고 남용적이며 착취적”이라며 “텍사스에서는 TV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빅테크 기업이나 외국 적대 세력에게 개인정보를 넘겨주는 일이 없도록 기본권을 보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입은 클릭 한 번, 해지는 15번”… 교묘한 ‘다크 패턴’ 논란
텍사스주는 특히 제조사들이 소비자가 정보 수집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거나, 설정을 해제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른바 ‘다크 패턴(Dark Pattern)’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소장은 삼성전자의 경우 정보 추적 등록은 한 번의 클릭으로 가능하게 설계한 반면, 이를 거부하거나 해지하려면 복잡한 설정 메뉴를 거쳐 무려 15회 이상 클릭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소비자가 사실상 추적을 포기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LG전자 역시 ACR 프로그램을 ‘시청 정보 계약’이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표기하여, 소비자가 이를 단순한 서비스 약관으로 오인하게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텍사스주 개인정보 보호 규정은 전자제품 제조사가 고객 데이터를 수집할 때 이를 명확히 공개하고 충분한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TV 가격 하락의 역설… “당신의 데이터가 제품이었다”
이번 소송의 배경에는 TV 제조사들의 수익 구조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TV 하드웨어 판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가격이 하락하자, 제조사들이 시청 데이터를 활용한 광고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는 분석이다.
더스트리머블은 “TV 가격이 수년간 저렴해진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제조사가 내장 기술로 시청 습관을 추적해 광고주에게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제조사들은 수집한 데이터를 광고 회사에 판매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시청자에게 정교하게 타겟팅된 맞춤형 광고를 노출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23년에는 ‘텔리(Telly)’라는 업체가 광고를 지속적으로 시청하는 조건으로 무료 TV를 제공하는 사업 모델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소송 대상이 된 기업들은 무료 제공이 아닌 고가의 제품을 판매하면서도 소비자 몰래 데이터를 착취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팩스턴 장관은 “기업들이 텍사스 시민을 몰래 감시하는 행위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며 법적 제재를 통해 ACR 사용을 제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업계에서는 이번 소송 결과가 향후 스마트 TV 업계의 데이터 활용 방식과 광고 수익 모델에 큰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텍사스發 데이터 전쟁… 韓 기업 신뢰도 타격 불가피
이번 소송은 스마트 가전이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서 ‘데이터 주권’이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편의를 위해 도입된 기술이 기업의 수익 창출 도구로 전락하면서, 정작 소비자는 자신의 안방에서조차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글로벌 가전 시장을 선도하는 삼성과 LG가 ‘소비자 기만’ 혐의로 제소된 점은 한국 기업들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소비자 신뢰도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수 있다. 향후 미국 내 다른 주(州)로 유사한 소송이 확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