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태양광 발전 설비의 핵심 부품인 중국산 인버터가 원격 조작을 통해 대규모 정전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미국 의회와 에너지 업계에서 제기됐다.
워싱턴포스트는 10일(현지시간) 연구기관 스트라이더 테크놀로지스가 독점 제공한 조사 결과를 인용해 보도했다.
美 전력사 85% 중국 정부 연계 인버터 사용
스트라이더가 미국 전력회사를 상대로 실시한 비공개 조사 결과, 응답 기업의 85% 이상이 중국 정부와 군에 연계된 기업이 제조한 인버터 장비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버터는 태양광 패널이 생산한 전기를 전력망과 호환되는 전류로 변환하는 핵심 장비다.
조사 대상 전력사들은 미국 전체 전력 생산량의 12%를 담당하고 있다. 스트라이더는 보고서에서 “중국 정부가 연계 기업과 데이터 네트워크 통제를 통해 위기 상황에서 미국 전력망을 조작하거나 교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토머스 패닝 전 서던컴퍼니 회장은 “인버터가 손상될 경우 위험은 단순히 전력 손실을 넘어 금융, 통신 등 다른 핵심 시스템까지 위협에 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패닝은 현재 미국 주요 에너지·금융·통신 기업의 시스템 보호를 전담하는 비영리단체 ‘핵심 인프라 연맹’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 11월 중국 제조사, 계약 분쟁에 장비 차단
우려는 이론에 그치지 않았다. 미중 경제안보검토위원회(U.S.-China Economic and Security Review Commission)는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서 지난해 11월 중국 제조사 닝보 더예 테크놀로지가 계약 분쟁 도중 미국 내 설치된 자사 인버터 여러 대를 원격으로 비활성화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인버터를 “심각한 국가 안보 문제를 야기하는 취약점”으로 규정했다. 보고서 발표 직후 공화당 소속 의원 52명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중국산 인버터의 향후 수입 제한을 요구했다. 로이터 통신이 올해 초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 전력망에 연결된 중국산 인버터에서 무단 통신 장치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렉 레베스크 스트라이더 최고경영자(CEO)는 “능력은 이미 갖춰져 있고 총에는 장전이 돼 있다”며 “이제 중국 정부가 방아쇠를 당길지, 그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를 논의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태양광 급증에 중국 의존… “대체 불가능” 딜레마
미국의 중국산 인버터 의존은 지난 10년간 급증한 태양광 발전 수요와 맞물려 있다. 올해 미국 전력 시스템에 추가된 신규 에너지의 약 90%를 태양광 발전이 차지했다. 중국 정부가 생산을 보조하며 공급망 장악을 추진하는 동안 미국 인버터 제조사들은 가격 경쟁에서 밀려났다.
사이버 보안 전문가 패트릭 밀러는 미중 위원회 청문회에서 “현재 미국은 다른 곳에서 이 장비를 구매할 선택지가 없다”며 “중국산 인버터를 제거하고 교체하려 하면 필요한 전력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중국산 인버터를 미국 보안 당국이 검증하고 인증해 무단 통신 장치를 제거하고 조작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국 애리조나주 법인위원회의 닉 마이어스 부위원장은 최근 조사에서 “기업들이 해당 인버터를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하더라도 수량이 적어 모두 동시에 꺼져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별일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반면 미국 에너지부 고위 관계자는 익명으로 “바이든 행정부 시절 에너지부와 국립연구소 기술 전문가들이 중국산 인버터의 보안 위험을 제기했지만, 고위 정책 입안자들이 이를 외면했다”며 “중국산 청정에너지 기술이 녹색 에너지 전환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국의 ‘볼트 타이푼’ 작전… 美 인프라 침투 경고
보안 전문가들은 중국이 미국 인프라에 침투한 전력이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국토안보부는 중국군의 ‘볼트 타이푼(Volt Typhoon)’ 작전을 통해 상수도·전력 시스템 등 핵심 인프라에 침투해 향후 분쟁 상황에서 시스템을 교란할 태세를 갖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산업 사이버 보안 기업 드라고스의 로버트 M. 리 CEO는 “중국이 인버터를 해킹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증거는 보지 못했지만, 중국은 외국 인프라 침투를 활용한 전력이 있다”며 “미국과 중국이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충돌할 경우 미국이 중국에 의존하는 모든 것이 공급망에서 단절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관리들은 이런 우려가 근거 없다고 반박한다. 류펑위 중국대사관 대변인은 이메일을 통해 “사실을 무시하고 근거 없이 에너지 인프라 분야에서 중국의 성과를 왜곡하고 비방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미국 기업들은 자체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옥상 태양광 기업 엔페이즈(Enphase)는 보안 우려를 이유로 비용이 더 들더라도 대부분 인버터를 국내에서 조달한다고 밝혔다. 엔페이즈 공동창립자 라구 벨루르는 “더 엄격한 미국 보안 규정이 더 많은 기업이 인버터 공장을 국내에 짓도록 촉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도 95% 중국 의존…정부, 대책 필요하다
한국도 중국산 인버터 의존도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태양광 인버터 시장의 90~95%가 중국산 또는 중국에서 주문자 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생산돼 국내 브랜드를 붙인 제품인 것으로 확인됐다.
보도에 따르면, HD현대에너지솔루션, 한화큐셀, 효성중공업 등 국내 대기업들이 판매하는 인버터가 실제로는 중국 친트파워, 선그로우, 화웨이 등 중국 기업 제품에 국산 브랜드를 단 ‘택갈이’ 제품으로 확인됐다. 향후 10년간 국내 인버터 시장 규모는 7조 5000억~1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산업부는 지난 5월 21일 HD현대에너지솔루션, 한화큐셀, 효성중공업 등 국내 인버터 제조·판매 기업들을 긴급 소집해 중국산 제품의 유통 경로와 사이버 보안 문제를 집중 점검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인버터는 통신 장비가 탑재된 구조로 해킹 등 사이버 공격에 취약할 수 있어 실태 점검에 나섰다”며 “자칫 보안 사고 발생 시 국내 전력망 정보 유출은 물론 인버터 조종을 통한 고의 정전이나 전력망 사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태양광산업협회 관계자는 “국내 인버터 시장은 KS 인증을 받을 때 보안이나 통신 부분에 대한 보안성 검증 기준이 없는 것이 문제”라며 “누군가 악의 통신 칩을 설치하더라도 인증 단계에서 걸러낼 제도 장치가 없어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라도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국산화를 위해 중국산 인버터 비중을 단기로 60% 미만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중국산 인버터에 대한 KS인증 강화, 공공프로젝트에서 국내산 우대, 국내 생산 기업 보조금 지원 등 다각 대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