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면적보다 좁은 해협 하나가 대한민국 경제 시계를 멈출 수 있다면 믿겠는가. 이란과 이스라엘의 무력 충돌로 페르시아만(灣) 관문인 호르무즈 해협의 유조선 운항이 사실상 중단되자, 세계 최대 에너지 수입 벨트인 동아시아 전체에 ‘공급 쇼크’ 경보가 발령됐다. 한국·중국·일본·대만을 아우르는 아시아 제조 강국들이 겉으로는 세계 최첨단 반도체와 자동차를 생산하면서도, 에너지 자립도는 10~30%에 불과하다는 구조적 민낯이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해협 폭 48㎞, 세계 원유의 20%가 지나가는 ‘석유 동맥’
호르무즈 해협은 폭이 가장 좁은 구간에서 48㎞에 불과하지만, 하루 약 2000만 배럴의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가 이 수로를 통과한다. 전 세계 해상 원유 교역량의 20%, LNG 교역량의 약 25%가 집중된 ‘에너지 대동맥’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6일 이 수로의 봉쇄 가능성만으로도 아시아 에너지 시장이 패닉에 빠졌다고 전했다. 컨트롤리스크(Control Risks)의 앤드류 길홈 중국·북아시아 분석 전문가는 FT를 통해 “아시아 주요 경제국들은 세계에서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가장 높은 국가군이자 글로벌 제조 공급망의 핵심축”이라며 “상황이 매우 빠른 속도로 악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호르무즈 해협이 한 달이라도 막힌다면 인도네시아는 공장 가동을 멈춰야 하고, 파키스탄은 즉각적인 연료 배급제를 시행해야 하는 현실을 의미한다.
나티시스(Natixis) 아시아·태평양의 알리시아 가르시아 에레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FT에 “호르무즈 경로 의존도가 높고 전략 비축량이 부족한 한국·대만·태국의 경우, 이번 사태는 재앙적 시나리오에 근접한다”고 경고했다.
한국의 딜레마, 원유 70%·LNG 20%가 호르무즈를 통과한다
한국은 원유 수입량의 70%를 중동에서 들여오며, 천연가스(LNG)도 20%가량을 같은 경로로 조달한다. 전체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90%를 웃돌아, 국내 생산만으로는 수요의 10% 미만 정도만 충당 가능하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취약성이 수십 년째 구조적으로 고착됐다는 점이다. 세계은행(World Bank) 장기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에너지 사용량의 80~90% 이상을 해외에서 조달하는 패턴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가스공사, 한국석유공사 등이 수십 년간 수입선 다변화를 추진했지만, 중동산 원유의 가격 경쟁력과 수송 편의성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비축유 방출은 단기 처방일 뿐”이라며 “호르무즈 봉쇄가 3개월 이상 지속된다면 수입선 다변화와 에너지 믹스 전환이 동시에 강제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일본, 254일치 비축…대만은 ‘이달 말 한계’ 경보
동아시아 국가 중 비교적 방어선이 두터운 곳은 일본이다. 254일분의 석유 비축량을 확보하고 있어, 공급 중단이 수개월 이어져도 즉각적인 경제 마비는 피할 수 있다. 아카자와 료세이(赤澤亮正) 일본 경제산업상은 ‘에너지 대책 본부’를 즉시 설치하고 “안정적 에너지 공급을 위해 모든 역량을 결집하겠다”고 선언했다.
반면 대만은 상황이 더 긴박하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심장부이지만 화석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대만 정부는 지난 4일 LNG 재고가 이달 말 수준이라고 공식 인정하면서, 미국·호주와 긴급 공급 협의에 들어갔다. 세계 첨단 칩 생산의 60% 이상을 책임지는 국가가 한 달치 연료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은, 아시아 공급망의 구조적 취약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 ‘수출 차단’ 카드…러시아산 원유로 뛰는 인도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인 중국은 한발 앞서 내부 통제 모드에 진입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자료를 분석한 FT에 따르면, 중국의 석유 순수입 의존도는 2017년 이후 가파르게 상승해 2026년에는 17% 이상의 수요 증가 지수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는 주요 정유사에 항공유를 제외한 석유 제품 수출을 최대한 억제하라는 내부 지침을 내렸다. 리스타드 에너지(Rystad Energy)의 예 린 분석가는 “중국이 해외 판매보다 내부 비축에 집중함으로써 자국 연료 공급 안정성을 최우선에 놓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도 역시 대안 확보에 분주하다. 하르디프 싱 푸리 석유장관은 단기적 충격은 제한적이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시장에서는 인도가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더욱 확대할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 팽배하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지난 5일 인도 정유사들이 제재 대상인 러시아산 원유를 30일간 구매할 수 있도록 한시적 예외를 승인했다. 서방 제재망을 우회하는 ‘원유 리루팅’이 사실상 공인된 셈이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가 미국산 원유 도입을 늘리는 방식으로 중동 의존도 축소에 나섰다. 바흘릴 라하달리아 에너지장관은 현재 23일분에 불과한 비축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신규 저장 시설 건설에 즉시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에너지 안보의 진짜 과제, 가격이 아닌 ‘물량 확보’
과거 에너지 위기는 대부분 가격 급등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이전과 다른 점은 가격이 아닌 물리적 공급 중단이라는 점이다. 유조선이 항구를 떠나지 못하면, 아무리 높은 값을 치르더라도 원유를 살 수 없다.
한국도 수급 불안에도 단기 충격 흡수 능력은 상당하다는 평가다.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2025년 말 기준 한국 정부의 전략 비축유는 1억 배럴을 돌파해 약 117일분에 달한다. 여기에 민간 보유량까지 합산하면 약 200~210일분(약 7개월)으로, 국제에너지기구(IEA) 권고 기준인 90일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정부는 이미 ‘자원안보 위기경보’를 발령하고 비상 대응 체계를 가동 중이다. 그러나 봉쇄가 수개월 이상 장기화될 경우, 비축유 방출 시점과 업종별 배정 기준을 놓고 정부와 정유업계 간 협의 과정에서 긴장이 불거질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실질적인 변수로 남는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당장 세 가지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짚는다. ▲아프리카·중앙아시아 등으로의 수입선 분산 ▲LNG 장기계약 비중 확대를 통한 현물시장 노출 최소화 ▲민관 공동 비축 시스템 강화가 그것이다.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한국 핵심 수출 산업의 경쟁력이 결국 ‘에너지 안보’라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이번 사태는 다시 한번 냉혹하게 일깨우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이 언제 해소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중동의 총성이 울릴 때마다 아시아 경제가 흔들리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에너지 수입 구조의 근본적 전환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