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7월 10일. 일본 간토 북부 도치기현에서 비행장 건설 공사에 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 3명이 갑작스러운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마이니치신문은 이들의 78주기를 앞둔 지난 1일, 8년 전 세워진 추모비에 관계자들이 헌화했다고 보도했다.
사건 당시 일본 육군은 도치기현 도치기시의 한 마을에서 비행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현지에서 발견된 고문서에 따르면 이곳의 이름은 ‘시즈와 비행장’이었다. 미쓰비시전기가 군용 낙하산 시험을 위해 확보했던 소형 부지를 일본 육군이 사들였다.
본격적인 공사는 1945년에 시작됐고 지역 청장년층이 대부분 소집됐다. 개간과 정돈 등의 작업에는 징용 조선인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방공호와 격납고 등도 차츰 정비되고 시험 비행도 있었지만, 같은 해 여름 미군 비행기가 들이닥쳤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 주민은 “저녁에 비행장에 가 보니 기총을 맞은 사람이 있었고, 지름이 약 10여m가 되는 깔때기 모양의 폭격 흔적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고 회고했다.
시 여성사 연구회는 한 증언집을 인용해 “격납고를 (미군) 함재기가 폭격하러 왔다”며 “기총소사를 받아 1명이 사망하고 몇 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이후 조선인 징용에 관한 공문서가 공개되면서 도치기현 내 조일우호단체가 결성한 ‘도치기현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 조사단’이 1997년 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은 인근 사찰의 기록 등을 토대로 조선인 노동자 최소 3명이 사망한 것을 뒤늦게 밝혀냈다.
사실이 확인되자 2015년 7월에 북한의 공민 단체인 조선총련(조총련)과 조일우호현민회 등이 추모비를 세웠다.
마이니치신문은 아직 미군이 이 비행장을 왜 공습했는지 전말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증언 기록을 보존하고 있는 후지오카시 역사민족자료관의 이시카와 유리코는 마이니치 인터뷰에서 “지금부터 사실을 파헤치는 건 어렵다. 지금 있는 자료를 정리해 다음 세대에 단서를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