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년 12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지형이 송두리째 바뀐다. 미국 연방정부가 중국산 반도체를 탑재한 모든 부품·완제품·서비스의 조달을 원천 봉쇄하는 초강도 규제를 공식화하면서다. 한국 반도체 업계에는 반사이익의 문이 열리는 동시에 거래처 다변화와 단가 경쟁이라는 이중 압박이 밀려오고 있다.
“15달러 커피값도 규제”…전례 없는 광역 규제망
미국 연방취득규정위원회(FAR Council)는 지난 2월 17일 중국산 반도체를 포함한 전자 부품·제품·서비스의 연방 조달을 금지하는 규칙 제정안(NPRM)을 관보에 공고했다. 2023 회계연도 국방권한법(NDAA) 제5949조에 근거한 이번 조치는 오는 2027년 12월 23일 발효된다.
지난 2일(현지시각) 폴란드 IT 매체 텔리폴리스(Telepolis) 보도를 종합하면, 이번 규제가 이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적용 범위의 파격적 확장’이다. 기존 안보 관련 핵심 시스템에만 국한됐던 규제가, 이번에는 1만5000달러(약 2200만 원) 미만의 소액 구매와 일반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용 완제품(COTS)까지 망라한다.
제재 대상 기업은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SMIC, D램 전문 기업 CXMT(창신메모리), 낸드플래시 제조사 YMTC(양쯔메모리)이며, 각 사의 자회사와 계열사도 예외 없이 포함된다.
디지타임즈 아시아의 리바이 리(Levi Li) 기자는 “미국 국방부·상무부가 국가정보국(DNI) 등과 협의해 제재 대상 기업을 수시로 추가할 권한을 가졌다”며 “북한·러시아·이란 등 우려 국가와 연계된 기업으로 규제망이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PC·노트북 제조사, ‘이중 공급망’ 구축 의무…10년간 1조4700억 원 비용 불가피
규제 시행 이후 연방정부와 계약하는 제조사들은 자사 공급망에서 금지된 중국산 칩이 없음을 입증하는 ‘합리적 조사’ 결과를 의무 제출해야 한다. 납품 후 중국산 칩이 발견되거나 의심될 경우 72시간 이내 당국 신고 의무도 부과된다.
텔리폴리스는 “노트북·PC 제조사들이 미국 정부 납품용과 일반 소비자용 제품의 공급망을 이원화해야 하는 구조적 전환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연방취득규정위위원회(FAR Council) 자체 추산에 따르면 업계 전체가 향후 10년간 공급망 검토·제품 재설계 등에 투입해야 할 비용은 10억 달러(약 1조4700억 원)를 상회할 전망이다.
완충 장치도 마련됐다. 2027년 12월 23일 이전에 취득한 기존 장비는 교체 의무를 면제하는 ‘기득권 보호’ 조항이 포함됐고, 대체품 확보가 어렵거나 안보에 즉각적 위협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2년 단위 한시적 유예를 신청할 수 있다. 행정부는 4월 20일까지 업계 의견을 수렴한 뒤 최종 규정을 확정할 계획이다.
삼성·SK하이닉스, ‘어부지리’인가 ‘이중고’인가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이번 규제는 국내 반도체 업계에 복잡한 파장을 던진다.
표면적으로는 반사이익이다. 중국산 저가 D램(DRAM)이 연방조달 시장에서 퇴출되면,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비(非)중국 메모리 3사의 가격 교섭력이 높아진다. 업계 관계자들은 “특히 레거시(구형 공정) D램 수요처가 중국산 대신 한국산으로 전환하는 흐름이 가시화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공급 여력이 문제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설비 상당 부분을 AI 서버용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에 집중 투입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TrendForce)는 2026년 이후에도 주요 제조사의 HBM 생산 비중 확대가 이어지며 소비자용 DDR4 등 범용 D램의 공급 압박이 심화될 것으로 분석했다. 중국산 공급마저 미국 시장에서 차단될 경우, PC·노트북 탑재용 메모리 가격의 급등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중 공급망 운영에 따른 물류비와 부품 단가 상승분이 소비자 가격에 전이될 개연성도 크다. 업계 전문가들은 “공급망 재편이 본격화되는 2027년을 기점으로 IT 기기의 가격 인상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지정학 논리가 경제 논리를 압도하는 시대, ‘탈중국 공급망’은 이제 선택이 아닌 규정이 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 거대한 재편의 수혜자로 자리매김하려면, HBM 쏠림 속에서도 범용 메모리 공급 역량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2027년 12월이라는 카운트다운이 이미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