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상호관세 부과 시한이 8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한미 간 협상에 속도가 붙지 않고 있다. 정부는 협상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미국 측이 요구하는 대미 투자 방안을 찾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재계 총수들과 잇따라 만남을 갖고 각 기업들의 투자여력을 점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25일(현지시간) 예정됐던 한미 2+2 협상은 미국 측의 통보로 취소됐다. 애초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스콧 베선트 미 재무부 장관 및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협의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불발됐다. 이날 오전 출국 예정이었던 구 부총리도 인천공항에서 발길을 돌렸다.
미국 현지의 협상이 차질을 빚으면서 우리 정부가 제시한 협상안이 미국 측을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숫자’를 중시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특성상 대미 투자펀드 조성안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 현안 중 하나로 거론된다.
앞서 협상을 타결한 일본은 애초 미국으로부터 4000억 달러의 투자를 요청받았다가 트럼프 대통령과의 협상 과정에서 총 5500억 달러(760조 원)로 규모를 늘렸다.
블룸버그 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우리나라에도 4000억 달러(약 550조 원) 규모의 투자를 제시하고 있다. 최소한 일본과 같은 15%의 관세를 목표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도 대미 투자 계획을 전면 재검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재계 총수와 잇달아 만나 기업의 투자 여력을 점검하고 있다. 지난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만난 데 이어 이번주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김동관 한화 부회장을 만났다. 이날 저녁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만찬 회동을 갖는다.
이들 기업은 이미 미국에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상태지만 정부와 함께 추가 투자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3월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210억 달러 규모의 투자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삼성전자도 370억 달러 이상, SK하이닉스도 28억 7000만 달러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아울러 정부는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 등 카드도 완전히 배제하진 않고 있다. 특정 카드를 염두에 두지 않고 협상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적극 고려한다는 방침이다.
방위비 등 안보 현안도 통상 협상과 얽혀있는 만큼 방위비와 국방비 인상도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할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위 실장 또한 지난 한차례 방미 과정에서 미국 측에 투자·구매·안보 등 패키지 협상을 제안한 바 있다.
한미 관세협상을 위해 미국에 파견된 정부 인사들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베선트 장관의 긴급한 일정으로 2+2 협상을 개최하지 못했다”며 “미국 측이 조속한 시일 내에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한미 양측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일정을 잡을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협상 시한을 8일 남겨둔 상황에서 일정이 연기되자 한미가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20일 출국해 미 행정부 인사들을 만나왔는데 여기에서도 협상에 큰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위 실장은 자신의 카운터파트인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보좌관과도 만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은 “위 실장은 이번 방미 기간 미 행정부 내외 인사를 만나 우리 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했다. 한미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긴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면서도 “미 측 접촉 인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제한된다”고 밝혔다.
이날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는 위 실장은 별도의 언론 브리핑도 계획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달 초 방미 이후 언론에 협상 경과를 알린 것과 대조적이다.
영국·베트남·인도네시아·필리핀이 트럼프 대통령이 공언한 상호관세 25%에서 하향된 숫자로 협상을 타결한 가운데 일본도 15% 관세에 합의하자 우리 정부는 협상 전략을 조정하며 총력 대응에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는 자동차와 더불어 철강에 대한 품목 관세 하향 조정도 절실해 트럼프 대통령의 눈길을 끌 만한 ‘빅딜’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