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의 빛이 밝을수록, 전기요금 청구서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있다. AI 기술의 핵심 기반 시설인 데이터센터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미국 전역의 전기요금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그 부담이 고스란히 일반 가정에 넘겨져 생계까지 위협하는 모순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는 2035년까지 미국 전체 전력 소비의 9%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되며, 이는 식료품과 주거비 상승으로 이미 압박받는 가계에 또 다른 충격을 안기면서 미국 사회에서 새로운 경제·정치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각) 블룸버그 통신의 분석은 AI 붐이 전력 시장에 미친 충격을 뚜렷한 수치로 보여준다. 2020년 메가와트시(MWh)당 16달러 수준이던 도매 전기요금은 데이터센터 밀집 지역에서 불과 5년 전보다 최대 267%나 급등했다. 도매 전기요금은 전력망 유지·확장 비용과 함께 각 가정과 기업의 청구서에 반영된다. 이 때문에 데이터센터와 거리가 먼 지역의 주민이라도 같은 전력망을 사용한다면 요금 인상의 직격탄을 피할 수 없다. 실제로 가격이 오른 전력망 지점(노드)의 70% 이상이 데이터센터에서 50마일(약 80km) 안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버지니아 북부 ‘데이터센터 앨리’를 중심으로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같은 인근 도시의 전력 비용이 크게 늘었다.
빅테크는 투자 확대, 전력망은 포화 직전
AI 기술에 미래를 건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는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있다. 엔비디아는 새로운 데이터센터 건립을 위해 오픈AI에 최대 1000억 달러(약 140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고, 마이크로소프트는 뉴저지 데이터센터를 써서 약 200억 달러(약 28조 원) 규모의 클라우드 컴퓨팅 계약을 맺었다. 오픈AI와 오라클은 미국 수백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4.5기가와트(GW) 규모의 데이터센터 용량 확보에 나섰다. 마크 크리스티 전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 위원장은 “전력 신뢰도 위기는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의 문제”라며 “데이터센터 연결 요청이 이끄는 전력 수요 예측이 비용 상승의 핵심 요인”이라고 짚었다.
이러한 전력 대란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는 AI 붐 기대감으로 전력 경매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고, 말레이시아는 새 시설 증가에 따른 공급 부족을 이유로 데이터센터 전기요금을 올렸다. 영국에서는 데이터센터 수요 증가 탓에 2040년까지 전력 가격이 9%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블룸버그NEF는 2035년까지 미국 내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두 배로 뛰어 전체 수요의 9%에 육박할 것으로 내다봤다. 전력 수요 급증에 노후화된 기반 시설과 기후변화 대응 압박이 겹치면서 1960년대 에어컨 보급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에너지 수요 증가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런 거시 수치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혹독하다. ‘데이터센터 앨리’가 있는 버지니아 북부에서 차로 한 시간 넘게 떨어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사는 케빈 스탠리(57)의 사례가 이를 상징처럼 보여준다. 장애 수당으로 생활하는 그의 에너지 요금은 3년 전보다 80%나 올랐다. 그는 “요금은 끝없이 오르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버지니아주는 앞으로 2년간 평균 가정용 전기요금을 월평균 20달러 올릴 예정이다. 이러한 부담은 저소득층과 노인 같은 사회 취약 계층에 특히 더 큰 타격으로 돌아온다. 그의 질문은 단순히 개인의 하소연을 넘어, 기술 발전의 혜택에서 소외된 채 비용만 떠안게 된 서민들의 절규를 대변한다.
요금 폭탄에 커지는 갈등, 해법은 있나
볼티모어를 포함한 미국 최대 전력망 운영업체 PJM 인터커넥션은 데이터센터에서 비롯된 수요 급증으로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다. PJM의 독립 시장 감시 기관에 따르면, 데이터센터 확장으로 소비자들에게 12개월 동안 93억 달러가 넘는 추가 비용이 안겨졌으며, 이 비용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실제로 볼티모어 주민들은 전력 경매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월평균 17달러가 넘는 요금 인상을 감당해야 했다. 올해 경매 가격이 또다시 최고 기록을 세우면서 2026년 중반부터는 최대 4달러의 추가 인상이 예고됐다.
볼티모어 지방 법원의 니콜 파스토레 판사는 지난 한 해 자신의 공과금이 50%나 급등했다며 “청구서를 보면 ‘맙소사’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법정에서 임대 분쟁을 다루면서 “공과금이냐, 집세냐를 두고 고뇌하는 가난한 이들을 매일 목격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생존의 기로에 선 서민들의 처지를 보여준다. 스탠리는 “AI가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나? 내 청구서를 내주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되물었다.
현대 사회는 챗GPT, 우버, 넷플릭스 등 데이터센터가 주는 편리함 없이는 유지되기 어렵다. 기술 기업들도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같은 3대 클라우드 기업은 2024년 2000억 달러(약 480조 원) 이상을 데이터센터 건설과 전력 효율 개선 기술 개발에 쏟아부으며 냉각 기술 개선, 저전력 칩 개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전력회사들 역시 데이터센터가 기반 시설 비용을 공정하게 나눠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운다. 도미니언 에너지의 에런 루비 대변인은 “데이터센터가 전력 비용 전액을 부담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요금을 설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부 지역에서는 낡은 석탄 발전소의 수명을 늘리거나 원자력 발전을 다시 돌리고, 차세대 원자력 기술 개발에 나서는 등 새 에너지 공급원 확보에도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갈등이 커지고 있다. 펜실베이니아주는 소비자 비용 억제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PJM 시스템에서 나올 수 있다고 경고했으며, 오리건주는 데이터센터와 암호화폐 채굴업체를 겨냥해 공평한 전기요금 부과를 위한 ‘POWER 법안’을 만들었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 말레이시아,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도 데이터센터 전용 요금제나 부과금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기술 발전의 비용을 누가, 어떻게 공평하게 나눠 질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부유층 주민 메리 러핀은 월 요금이 200달러에서 260달러로 올랐다. 그는 “수십억 달러를 버는 기업들과 우리가 불공평하게 부담을 나누고 있다”며 “우리 국민이 데이터센터 비용을 떠안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볼티모어의 앤투아넷 로빈슨은 치솟은 전기요금 탓에 매달 은행 계좌에 100달러도 채 남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케빈 스탠리는 일회용 면도기를 20번씩 쓰고 당뇨병 약품을 아껴 쓰며 버티고 있다. 그는 힘없이 말했다. “사람들이 가스·전기요금과 음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서는 안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AI가 이끄는 화려한 기술 혁신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