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보편화된 미국 기업의 재택근무 시스템이 북한 정권의 새로운 ‘외화벌이 루트’로 악용된 사실이 미 사법 당국의 수사로 드러났다.
미국 내 가정집에 수백 대의 노트북을 설치해 북한 IT 인력들이 현지인처럼 위장 근무하게 돕는 이른바 ‘노트북 농장(Laptop Farm)’이 적발된 것이다. 이곳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달러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자금으로 전용된 것으로 파악됐다.
블룸버그통신은 16일(현지시간) 탐사보도 프로그램 ‘블룸버그 인베스티게이츠’를 통해 북한 IT 노동자들의 미국 기업 불법 위장 취업을 도운 혐의로 기소된 크리스티나 채프먼에게 미 법원이 징역 102개월(8년 6개월)을 선고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판결은 북한이 허술한 비대면 채용 시스템을 파고들어 어떻게 미국 안보와 경제 시스템을 교란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꼽힌다.
평범한 가정집이 ‘평양의 환전소’로 둔갑
사건의 전말은 지난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딩 부트캠프를 갓 수료한 채프먼은 구인·구직 소셜미디어 링크트인을 통해 “소프트웨어 회사의 ‘얼굴’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해외 엔지니어와 미국 기업을 연결해 주는 업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북한 정부가 배후에 있는 치밀한 외화벌이 공작이었다. 채프먼의 역할은 자신의 거주지인 애리조나주 리치필드 파크의 자택으로 배송된 노트북을 받아 전원을 켜고 인터넷에 연결해 두는 것이었다.
미국 기업들은 채용된 직원이 미국 내에서 접속해 근무한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해외에 체류 중인 북한 IT 인력들이 원격 제어 프로그램을 통해 이 노트북에 접속해 업무를 수행했다. 채프먼의 집 선반 위에서는 수많은 노트북이 쉴 새 없이 깜박이며 북한 노동자들의 미국 기업 접속 통로 역할을 했다.
미 법무부는 “이들이 훔친 미국인 신분으로 미국 유력 기업들에 원격 취업했고, 여기서 벌어들인 급여 수백만 달러(수십억 원)가 평양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 자금은 고스란히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프로그램 자금으로 전용된 것으로 미 당국은 보고 있다.
“할당량 못 채우면 처벌”… 디지털 노예의 참상
이번 사건은 단순한 금융 사기를 넘어 북한 해외 노동자들의 열악한 인권 실태도 함께 드러냈다. 블룸버그와 인터뷰한 한 북한 IT 노동자는 “동료 엔지니어들과 함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가혹 행위와 처벌, 심지어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북한 정권은 해외에 파견한 IT 인력들에게 막대한 외화 상납을 강요하고 있으며, 이들은 감시 속에서 사실상 ‘디지털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미국 기업이 지불한 임금은 노동자의 주머니가 아닌 정권의 핵 개발 금고로 직행했다.
채프먼의 범행은 한 미국 기업의 보안 부서가 신규 채용 직원의 주소지가 다른 직원의 주소와 일치한다는 점을 수상히 여기면서 꼬리가 밟혔다. 신고받고 출동한 미 연방수사국(FBI)과 국세청(IRS)은 채프먼이 틱톡(TikTok)에 아침 식사 메뉴나 쇼핑 목록을 올리며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동안 은밀히 수사망을 좁혀갔다.
美 사법부 “안보 위협엔 무관용”… 기업 보안 경종
재판 과정에서 채프먼 측은 “고용주가 북한 정부와 연계된 줄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미 사법부의 판단은 냉혹했다.
미 검찰 당국은 채프먼의 행위에 대해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적성국의 무기 개발을 도운 중대 범죄”라고 규정했다. 법원 역시 징역 102개월이라는 중형을 선고하며 “범죄의 중대성을 엄중히 물은 것”이라고 판시했다. 단순 가담자라도 국가 안보에 구멍을 내는 행위에는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겠다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다.
보안 업계에서는 이번 사건이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근 딥페이크(Deepfake) 기술과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발달로 가짜 신분증 생성이나 화상 면접 통과가 더욱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기업들에 원격 근무자 채용 시 신원 검증 절차(KYC)를 대폭 강화하고, 의심스러운 접속 로그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북한의 사이버 외화벌이 수법이 날로 지능화되는 가운데, 기업의 느슨한 보안 의식이 자칫 국가 안보의 치명적인 구멍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