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쿠팡의 사상 최대 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단순한 기업 규제 논쟁을 넘어 한미 외교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한국 정부의 수사를 ‘미국 기업 겨냥’이라며 압박하는 미국 공화당과, “사법 주권 침해”라고 정면으로 맞서는 한국 국회 사이에서 양국 갈등은 무역·안보 영역으로까지 확산 중이다.
영국 매체 레스트오브월드(Rest of World)가 지난달 30일(현지시각) 보도한 내용과 한국 현지 취재를 종합하면, 이번 사태는 미국에 법인을 둔 기업이 타국 시장을 지배할 때 누가 규제권을 행사하느냐는 국제적 선례 논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3370만 계정 유출, 전 국민 3분의 2 피해
사태의 발단은 지난해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규제 당국은 쿠팡 전직 직원이 탈취한 보안 키를 이용해 수개월간 3370만 개 계정의 개인정보에 무단 접근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한국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2에 달하는 규모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장기간 이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유출된 정보에는 고객 이름, 이메일 주소, 전화번호, 배송 주소, 일부 주문 내역이 포함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쿠팡이 유출 사실을 24시간 이내에 관계 기관에 신고하지 않았고, 지난해 11월 내려진 데이터 보존 명령을 완전히 이행하지 않아 핵심 접속 기록이 삭제됐다고 밝혔다.
당국은 이를 ‘관리 실패’로 규정하고 알고리즘 조작 및 불공정 거래 관행에 대한 별도 조사에도 착수했다.
과징금 규모를 두고 업계 안팎의 시선이 쏠린다. 현행법상 전체 매출액의 최대 3%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데, 쿠팡의 최근 3년 평균 매출액을 감안하면 9000억 원대 과징금까지 가능하다.
쿠팡의 2025년 연결 매출이 45조 4555억 원으로 확정된 만큼, 이 기준 3%를 적용하면 이론상 최대 1조 3636억 원에 이른다.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으로 과징금 상한이 기존 매출액 3%에서 최대 10%로 높아졌으나,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이번 쿠팡 사건에 소급 적용은 고려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쿠팡은 법적으로 미국 기업이다. 델라웨어주에 설립되고 시애틀에 본사를 두며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있으나, 실제 사업과 고객 대부분은 한국에 집중돼 있다.
쿠팡은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이후 미국 연방 로비 활동에 총 1061만 달러(약 156억 7090만 원)를 써온 것으로 집계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선 직후에는 트럼프-밴스 취임위원회에 100만 달러(약 14억 7700만 원)를 기부하기도 했다.
미 공화당 54명 vs. 한국 의원 96명, ‘서한 외교전’
기업 수사가 외교 무대로 옮겨붙은 것은 지난달 20일(현지시각)이다.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 54명이 한국 측에 서한을 보내, 데이터 유출 이후 한국 정부가 쿠팡 사무실을 불법 압수 수색하고 과징금과 세무조사를 부과했으며 사업 면허 취소를 위협하고 국민연금 등 공공 연기금에 쿠팡 주식 매각을 압박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한국 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진보당·사회민주당 소속 의원 96명은 지난달 28일 주한 미국 대사관에 항의 서한을 전달하며 “범죄 혐의에 대한 조사와 판결은 주권국가의 전속 권한”이라고 반박했다.
박홍배 민주당 의원은 국회 기자회견에서 “외국 의원들이 국내기업 수사에 개입하고 이를 외교·안보 협력과 연계하려는 시도는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외교부는 공화당 서한에 공식 답변을 보낼지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박일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관계 부처와 협의 중”이라며 “쿠팡 수사가 국내법과 적법 절차에 따라 이뤄지고 있음을 미국 행정부와 의회에 지속적으로 설명해왔다”고 말했다.
로비 자금 지출도 도마에 올랐다. 미국 상원 로비공개법(LDA) 보고서에 따르면 쿠팡Inc의 올해 1분기 로비 지출은 109만 달러(약 16억 원)로, 쿠팡을 대리한 로비 회사 7곳의 수임료 69만 5000달러를 합산하면 총 178만 5000달러(약 26억 3640만 원)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 분기 평균의 두 배 수준으로,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불거진 이후 로비 지출이 급격히 불어난 것이다.
미국 투자자들의 법적 공세도 이어졌다. 그리노크스 캐피털 파트너스와 알티미터 캐피털 매니지먼트가 지난 1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 절차를 개시한 데 이어, 에이브럼스 캐피털 등 3곳이 추가로 가세해 총 5개 투자사가 ISDS에 참여하게 됐다.
무역·안보 압박까지 동원… 중국 플랫폼 부상 경고도
갈등의 파장은 경제 영역을 넘어섰다. 한국 국가안보실은 쿠팡 문제가 미국과의 안보 협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인정했다. 미국이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 지원 협의와 우라늄 농축 협정 이행을 보류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는 상황이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달 29일 쿠팡 창업자 김범석 의장을 쿠팡 그룹의 동일인, 즉 대기업집단 총수로 지정했다.
이로써 쿠팡은 삼성 등 재벌 수준의 엄격한 공시 의무와 감독을 받게 됐으며, 이 결정은 오는 5월 1일부터 발효된다. 쿠팡은 즉각 행정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미 의회 서한은 중국 플랫폼의 부상도 경고했다. 서한은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을 온라인 유통 시장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 빈자리를 테무·알리바바·쉬인 같은 중국 플랫폼이 채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웨스트엑스 어드바이저스 헨리 해가드 수석 자문위원(전 주한 미국 대사관 공사)은 레스트오브월드에 “미국 정부와 의회가 미국 기업을 보호하고 해외에서 미국의 이익을 증진할 의무가 있는 만큼, 행정부와 입법부가 쿠팡 및 한국 내 미국 사업 이익 전반을 지지하는 것은 논리적이고 정상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가 최대 1조 3636억 원의 과징금 부과, 5개 미국 투자사의 ISDS 소송, 안보 연계 압박이라는 삼중 구도로 전개되면서 미국에 법인을 둔 기업이 타국에서 규제받을 때의 국제적 기준을 새로 쓰는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