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고물가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인 소요 사태로 번진 배경에는 반세기 넘게 해결하지 못한 재정적자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중동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국민은 생활비 부담 완화와 공공서비스 확대를 요구하고 있지만, 막대한 국가부채에 짓눌린 정부는 추가 지원은커녕 기존 지출마저 줄여야 하는 처지다.
19일 블룸버그통신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지난 17일 프랑스 전역에서 최대 80만명이 생활비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지난달 말 교육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움직임이 고물가에 대한 불만과 결합하면서 전국으로 확산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방화와 약탈 등 폭력 사태로 번졌다.
문제는 정부가 이러한 요구에 대응할 재정 여력을 거의 소진했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장기간 누적된 적자와 급증하는 국채 이자 부담에 시달리고 있으며,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은 경기와 재정에 추가 부담을 주고 있다.
프랑스가 당장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지만, 재정적자를 줄이지 못하면 국채금리와 이자 비용이 상승해 적자가 더욱 확대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고물가에 시달리는 국민은 정부 지원을 요구하고 채권시장은 재정 긴축을 압박하면서 프랑스 경제의 선택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프랑스 통계청(INSEE)이 지난 15일 발표한 9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3.1% 상승했다. 8월 상승률인 2.4%보다 0.7%포인트 높아지며 2024년 1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물가 상승을 주도한 것은 에너지였다. 9월 에너지 가격은 1년 전보다 21.3% 급등했다. 석유제품 가격은 36.2% 뛰었으며, 경유와 휘발유 가격은 각각 44.1%, 25.7% 상승했다. 가스 가격도 19.0% 올랐다.
반면 에너지 등 변동성이 큰 품목을 제외한 근원물가 상승률은 1.5%에 그쳤다. 최근 물가 상승이 광범위한 수요 과열보다는 에너지 가격 충격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충돌로 호르무즈 해협을 비롯한 주요 원유 수송로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국제유가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브렌트유 가격은 지난 16일 배럴당 110달러에 육박했다.
에너지 가격 급등은 자동차 연료비와 난방비뿐 아니라 기업의 운송·생산 비용까지 끌어올린다. 프랑스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이 0.5%에 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어, 고물가에 따른 소비 위축이 경기 부진을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프랑스의 재정 문제는 구조적이다. 1974년 이후 한 번도 균형재정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이자 지급을 제외한 기초재정수지조차 2002년 이후 매년 적자를 기록했다.
저금리 시대에는 막대한 부채를 감당할 수 있었지만, 금리가 오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마크롱 정부는 2018년 ‘노란 조끼’ 시위 이후 재정 지출을 늘렸고,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위기 때도 대규모 지원에 나섰다.
WSJ은 프랑스가 저금리에 의존해 활용했던 이른바 ‘마법의 돈(magic money)’이 이제 ‘부채 폭탄(debt bomb)’으로 돌아왔다고 진단했다.
프랑스의 국가부채는 약 3조6000억유로로 국내총생산(GDP)의 120%에 육박한다. 재정적자는 최근 3년 연속 GDP의 5%를 웃돌았으며, 올해도 5.4%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연합(EU)이 정한 재정적자 상한선인 3%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국채금리 상승도 부담이다. 프랑스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이달 한때 5%에 육박해 2002년 이후 약 24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정부의 연간 이자 지출은 올해 약 790억유로에서 2027년 910억유로로 늘어나 교육예산을 넘어설 전망이다.
정부는 내년 예산안에서 지출 삭감과 세입 확대를 합쳐 430억유로 규모의 재정 조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를 모두 시행하더라도 내년 재정적자를 GDP의 5%로 낮추는 데 그칠 전망이다.
이미 프랑스의 조세부담률은 GDP의 약 4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34%를 크게 웃돈다. 추가 증세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연금과 복지, 교육 등 공공지출을 줄이려 하면 국민적 반발이 커질 수밖에 없다.
로드리고 발데스 국제통화기금(IMF) 재정국장은 지난 14일 프랑스가 시장의 신뢰를 유지하려면 2027년 예산안을 제때 통과시키고, 재정 건전화 노력을 약화하는 수정 없이 이를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의 페데리코 바리가살라사르 서유럽 국가신용등급 책임자는 프랑스의 현 상황을 “자금 조달의 문제가 아니라 재정의 문제”라고 진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