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의 국익 중심 실용외교가 오는 29일부터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험대에 오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계기 한미 간 관세 협상 타결 여부,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11년 만의 방한을 계기로 한 한중 관계 복원, ‘극우’ 성향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체제에서의 한일 관계 구도 설정, 그리고 북미 대화 재개의 여지까지, 이번 외교전은 ‘복합 과제’를 안고 있다.
이번에 우리 외교가 대미, 대중, 대일 외교에 있어 일정한 성과를 거둔다면 실용외교가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한미 협상이 교착 상태에 머무는 등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면 ‘빈손 외교’로 귀결됐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9일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의 최대 과제는 관세 협상 타결 여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요구한 3500억 달러(약 50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 협상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 상태다. 투자 방식·분할 시기·수익 배분 등을 두고 양국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는 현금 직접투자액을 낮추려는 제안을 제시했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이른바 ‘선불 투자’ 입장을 고수하면서 교착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한미 간 큰 틀의 합의는 이뤄졌지만, 협상 문서화를 낙관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한미 간 관세 협상과 관련해 “나는 서명할 준비가 돼 있다”라면서 한국 측이 준비를 마쳤다면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공을 우리 측에 넘기기도 했다.
관세 협상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이미 협상이 마무리 수순인 ‘안보 패키지'(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국방비 분담금 인상,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화 등)의 공동 발표도 연기될 가능성이 있다. 협상이 진전을 이루면 한미 정상회담이 APEC 외교의 ‘성과 회담’으로 기록되겠지만, 지연 시 실질적 성과 없는 회담으로 남을 수 있다는 우려가 외교가에서 제기된다.
APEC 정상회의 계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11년 만의 국빈 방한으로 성사된 내달 1일 한중 정상회담은 이재명 정부의 ‘대중 외교 복원’의 시험대다.
양국은 이번 회담을 통해 2008년 수립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실질적으로 재가동하고, 핵심 현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할 것으로 전망된다. 윤석열 정부 때 한중 간 실질적 교류가 위축되면서 양국 관계는 명목상 유지하되 실질적인 관계는 관리 국면으로 평가돼 왔다.
특히 이번 회담에선 중국의 서해 구조물 설치와 한화오션 제재를 비롯해 공급망 안정·한한령 해제 등의 현안이 회담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만 문제에 대한 ‘하나의 중국 원칙’ 재확인과 미중패권 경쟁 구도 속 중국의 ‘견제구’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대통령의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불가’ 입장에 대해서 시 주석의 설명 요구가 있을 수도 있다.
한중 정상회담에선 북한 문제 견인도 주요 과제 중 하나다. 지난달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의 중국 ‘전승절’ 행사 이후, 북중 관계 정상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북한 문제에 대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끌어내야 한다.
오는 30일에는 이 대통령이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신임 총리와 처음으로 마주 앉아 정상회담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여자 아베’로 불리는 다카이치 총리의 강경 우익 성향은 양국 관계의 새 변수로 꼽힌다.
이 대통령은 전임 이시바 시게루 내각 시절 복원한 셔틀외교 기조를 다카이치 내각에서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이 대통령이 신임 일본 총리와 조기 대면을 통해 셔틀외교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이 한일관계 안정의 관건이라고 평가한다.
우리 정부는 과거사 문제를 별도 트랙으로 관리하고, 경제·안보 협력에서는 실용 노선을 지속하는 ‘투트랙 외교’를 유지할 방침이다.
일본 역시 ‘트럼프 리스크’ 등을 감안해 한일 협력의 실리적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어, 경주 회담에서는 안정적 한일 관계 유지에 초점을 맞출 전망이다.
이번 APEC 기간 ‘최대 변수’ 중 하나는 북미 정상회담 개최 여부다. 그간 외교가에선 가능성은 낮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 제의’에 따라 김정은 총비서가 대화에 전격 나설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아시아 순방길에 오르기에 앞서 김 총비서와의 만날 가능성에 대해 “그렇게 하고 싶다”라며 “그는 우리가 그쪽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김 총비서 측에) 알려줬다. 그도 내가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며 “(만남에 대해) 100% 열려 있다. 나는 그와 아주 잘 지낸다”라고도 했다.
더욱이 그는 전용기 내에서 진행한 기자 간담회에선 북한의 고도화된 핵 능력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내기도 했다. 그는 “나는 그들이 일종의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핵무기 보유국)라고 생각한다”라며 다시금 논란이 될 만한 얘기를 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아래 합법적인 ‘핵보유국’ 인정과는 거리가 있다. 다만 그는 지난 1월과 3월에도 ‘뉴클리어 파워’라고 언급해, 궁극적으로 북한 비핵화는 현실적으로 상정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일부 우려가 제기된 바 있다.
현재 북미 정상 간 대면 성사의 공은 북한에 넘어가 있는 상황이다. 북한은 APEC 계기 북미 대화 재개 가능성에 대해 뚜렷한 반응을 내놓지 않아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