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이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 속에서도 협상을 이어가는 가운데, 이란이 경제 제재 완화라는 실익은 확보하면서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는 방식의 양보는 피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6일(현지시간) 이란 당국자들과 아랍권 중재국 관계자들을 인용해 이란이 현재 협상에서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나는 심각한 경제난을 완화하기 위한 금융·원유 제재 해제이고, 다른 하나는 핵 프로그램과 관련해 미국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란은 특히 서방에 동결된 약 1000억 달러(약 150조 원) 규모 자산 가운데 일부를 되찾고 국제 원유 시장에 복귀하는 것을 협상의 핵심 목표로 보고 있다.
미국과 이란은 최근에도 군사적으로 충돌했으나 대화의 끈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란의 협상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 중부사령부는 전날(25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기뢰를 설치하려던 이란 혁명수비대(IRGC)의 고속정을 공격했다고 밝혔다. 이에 이란은 미군 항공기를 향해 대응 사격을 가했고, 미국은 다시 이란 내 미사일 발사 기지를 타격했다.
이란 반관영 타스님통신에 따르면 혁명수비대는 전날 성명을 통해 방공부대가 페르시아만 상공에서 이란 영공을 침범한 미군 MQ-9 드론을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 CBS는 IRGC와 연계된 텔레그램 채널을 인용해 미군 공습으로 이란 남부에서 해군 병력 4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이란은 협상장을 떠나지 않았다. 최고 협상대표인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의회 의장은 카타르 도하에 머물며 중재 협상을 이어갔다. WSJ는 이란 관리들을 인용해 이란 당국은 흐름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혁명수비대원 사망 사실 발표도 늦췄다고 전했다.
이란 반관영 ISNA 통신은 이란과 카타르 간 회담이 호르무즈 해협 상황과 이란의 고농축 우라늄 문제 등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보도했다.
타스님통신은 이번 협상의 핵심 의제 가운데 하나가 이란 동결자금 120억 달러(약 18조 원) 해제 문제라고 전했다. 이란은 양해각서(MOU) 발표와 동시에 120억 달러가 우선 제공돼야 하며, 나머지 자금은 60일 이내 이전돼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WSJ에 따르면 이란이 협상 지속에 적극적인 배경에는 심각한 경제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장기 제재와 최근 전쟁, 미국의 봉쇄 조치가 겹치면서 이란 경제는 급속히 악화했다. 에너지 시설 타격으로 연료 배급제까지 시행됐고, 치솟는 물가와 생활고는 올해 1월 전국적 시위로 이어졌다.
이란 내 실용주의 세력은 경제 상황이 더 악화할 경우 반정부 시위가 재연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전쟁 이후 애국주의 분위기가 정부 비판을 잠시 억눌렀지만, 경제난이 심화하면 민심이 다시 돌아설 수 있다는 판단이다.
반면 강경파는 미국과의 협상 자체에 부정적이다. 혁명수비대의 드론·미사일 프로그램 책임자인 마지드 무사비는 “적과의 협상은 순수한 손실”이라고 주장하며 외교 노선을 비판했다. WSJ는 중재국들도 이란 강경 세력이 해상 교란 행위 등을 통해 협상을 방해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위성사진 분석업체 윈드워드에 따르면 혁명수비대 함정 3척이 최근 호르무즈 해협 남부에서 포착됐다. 오만만에서는 이날 유조선 폭발 사건도 발생했는데, 해당 해역은 과거 이란이 상선 공격을 벌였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 정부는 미국의 공격에 대해 보복 방침을 천명하면서도 협상은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동시에 내놓고 있다.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이란은 어떠한 악행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정부 대변인은 외교 노선이 계속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다만 이란 내부의 최종 의사결정 구조는 여전히 불투명하다고 WSJ는 지적했다. 새 최고지도자인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부친 알리 하메네이 사망 이후 공식석상에 전혀 등장하지 않으면서 실제 누가 협상을 주도하는지를 두고 중재국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란 측은 최고국가안보회의를 통한 집단 의사결정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 같은 비교적 온건한 인사뿐 아니라 군·안보 강경파도 참여하고 있다.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중재국 카타르의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에미르 국왕과 통화에서 “역내 안정을 위한 명확한 로드맵 마련을 위해 관련 문서와 합의문 작성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 중”이라며 “현재 진행 중인 전쟁과 분쟁을 종식할 ‘품위 있는 틀’을 달성하기 위해 완전히 준비돼 있다”고 말했다.
미국 역시 협상에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AFP통신에 따르면 인도를 방문 중인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전날 이란과의 합의가 여전히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는 “대통령은 합의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며 “좋은 합의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합의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한편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88일간 이어졌던 전국 인터넷 차단 조치를 종료하겠다고 발표했다. 인터넷 감시단체 넷블록스는 일부 통신망 연결이 실제로 복구됐다고 확인했다. 이는 이란 정부가 전쟁 국면 이후 내부 통제보다 경제·사회 정상화에 무게를 옮기기 시작했다는 신호로도 해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