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한때 제조업 부활의 핵심으로 떠올랐던 전기차와 배터리 공장 투자 붐이 빠르게 꺾이고 있다.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 폐지와 배기가스·연비 규제 완화, 배터리 소재 관세와 강화된 이민 단속 등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가 전기차 수요와 공장 투자에 부담을 주면서 수만개의 예정 일자리가 사라지거나 위태로워진 것으로 분석됐다.
로이터통신은 비당파 연구기관 아틀라스퍼블릭폴리시 등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취소된 미국 전기차·배터리 프로젝트로 사라진 일자리가 약 2만7000개에 달한다고 16일(현지시각) 보도했다.
고용계획을 공개하지 않은 프로젝트와 완전 취소 대신 규모를 축소한 사업은 포함되지 않아 실제 영향은 더 클 수 있다며 로이터는 이같이 전했다.
◇자동차 투자 증가분 사실상 전기차가 견인
미 자동차연구센터(CAR)에 따르면 2019~2024년 미국 자동차 제조업 투자 규모는 직전 6년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이 기간 늘어난 투자액은 사실상 모두 전기차 관련 사업에서 나왔다.
미국 자동차업계는 중국이 빠르게 장악하던 전기차·배터리 공급망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내 생산기반 구축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시작된 대중국 무역정책과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배터리 보조금 정책도 미국 내 생산시설 투자를 촉진했다.
그러나 투자 열기는 급격히 식었다.
아틀라스퍼블릭폴리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약 200억달러(약 27조3840억원) 규모의 전기차 관련 프로젝트가 취소됐다.
신규 투자 발표액은 약 65억달러(약 8조9000억원)에 그쳐 전년의 29% 수준으로 줄었다.
미국 자동차업계의 투자계획은 2023년 약 550억달러(약 75조3060억원)로 정점을 찍은 바 있다.
◇공화당 우세지역에 투자도 취소도 집중
전기차 투자 위축의 충격은 조지아주에서 인디애나주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배터리 벨트’에 집중되고 있다.
로이터가 아틀라스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5년부터 올해 8월24일까지 발표된 미국 전기차 관련 투자의 약 87%는 트럼프 대통령이 2024년 대선에서 승리한 주에 몰렸다.
2025년 이후 취소된 투자 가운데 약 80%도 공화당 우세주에 집중됐다.
대표적인 곳이 오하이오주 로즈타운이다.
GM과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사 얼티엄셀즈는 이곳에 23억달러(약 3조1490억원)를 들여 배터리공장을 건설했다.
지난 2022년 공장이 문을 열면서 약 1300명이 전기차용 배터리 셀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과거 철강산업으로 유명했던 이 지역에는 ‘볼티지 밸리’라는 별칭까지 생겼다.
그러나 전기차 판매 둔화로 올해 1월 생산이 중단됐고 약 480명이 무기한 해고됐다. 나머지 직원 약 850명도 수개월 동안 일하지 못했다.
최근 약 700명이 복귀해 8월 중순부터 배터리 셀 생산이 재개됐지만 약 600명은 여전히 무기한 휴직 상태라고 회사 측은 밝혔다.
◇SK온 합작공장도 5000명 계획서 2100명으로
포드와 SK온이 켄터키주 글렌데일에 건설한 배터리 생산단지도 당초 계획보다 크게 축소됐다.
양사는 2021년 58억달러(약 7조9410억원)를 투자해 배터리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켄터키주 역사상 최대 단일 투자였으며 5000개의 일자리를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약 1500명의 직원이 해고됐다.
포드는 현재 이 공장에서 전기차용 대신 에너지저장장치용 배터리를 생산할 계획이며 2027년 말 생산을 시작하면서 약 2100명을 채용할 계획이라고 로이터에 밝혔다.
이는 애초 예상했던 인력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스텔란티스와 삼성SDI가 인디애나주 코코모에 추진했던 60억달러(약 8조2150억원), 2800명 고용 규모 배터리 사업도 일부가 중단된 상태다.
스텔란티스는 전기차 사업에서 270억달러(약 36조9680억원)를 상각하는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다.
삼성SDI는 해당 인디애나 사업의 향후 계획을 놓고 스텔란티스와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7500달러 세액공제 폐지가 결정적 계기
자동차업계 관계자들이 가장 자주 언급한 정책 변화는 최대 7500달러(약 1027만원)의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 폐지다.
포드의 짐 팔리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9월 세액공제 종료 이후 전기차 판매가 급감한 것이 대규모 전기차 투자자산을 상각하기로 결정한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밝혔다.
다만 미국의 전기차 투자 둔화가 전적으로 트럼프 행정부 정책 때문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전기차는 높은 차량 가격과 주행거리 우려 등으로 미국 소비자들의 수요가 자동차업체들이 예상했던 수준에 미치지 못했고 투자 둔화는 정책 변화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고 로이터는 설명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세액공제 폐지 외에도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를 완화했으며 의회는 자동차업체들이 연방 연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내던 벌금을 사실상 동결했다.
중국이 대부분 생산하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와 음극재용 흑연 등에 높은 관세를 부과한 것도 미국 배터리 생산비용을 끌어올렸다.
◇백악관 “바이든이 보조금으로 인위적 수요 만들어”
트럼프 행정부는 전기차 지원 축소가 미국 자동차 제조업을 약화시켰다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쿠시 데사이 백악관 대변인은 로이터의 질의에 트럼프 행정부 정책이 자동차 제조업 고용에 미친 영향에 직접 답변하지 않고 바이든 행정부가 보조금을 통해 전기차의 ‘인위적인 수요’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규제 완화와 무역협정 재협상, 감세를 통해 국내외 자동차업체들로부터 수십억달러를 포함한 대규모 제조업 투자를 끌어내고 있다고 밝혔다.
공화당과 트럼프 행정부는 전기차 지원정책 철회를 소비자의 차량 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로 평가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 행정부의 규제가 미국인에게 전기차 구매를 사실상 강요하는 ‘EV 의무화’ 정책이라고 주장해왔다.
바이든 행정부 규정 아래에서도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동차업체들은 2030년대 초까지 판매량의 약 절반을 전기차로 전환해야 연비·배출 기준을 맞출 수 있는 구조였다.
◇내연기관 투자 늘어도 자동차 고용은 감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일부 자동차업체들은 전기차 사업을 줄이는 대신 내연기관 자동차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포드는 테네시주 신규 공장에서 취소한 전기 픽업트럭 대신 내연기관 차량을 생산하기로 했다.
스텔란티스 역시 대형 V8 엔진을 탑재한 픽업트럭 등 내연기관 모델을 적극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연기관 생산 확대와 관세 회피를 위한 미국 공장 활용이 전기차 투자 축소에 따른 고용 감소를 상쇄하지는 못했다.
미 연방정부 통계에 따르면 2025년 1월 이후 미국 자동차 제조업 일자리는 1.3% 감소해 올해 8월 약 96만3000개로 줄었다.
자동차업체들은 유휴 전기차 배터리공장의 일부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에 필요한 에너지저장장치 배터리 생산시설로 전환하고 있다.
그러나 전기차용 공장을 에너지저장장치용으로 바꾸는 데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릴 수 있으며 저장장치 배터리 수요만으로는 전기차용으로 건설된 유휴 생산능력을 모두 채우기 어렵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로이터는 미국이 단기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내연기관 차량 판매를 늘릴 수 있지만 전기차 판매가 빠르게 확대되는 중국과 유럽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며 장기적인 자동차산업 경쟁력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