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국가정보원장의 미국 방문 ‘거부’ 논란은 정확한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신뢰가 떨어진 한미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라는 분석이 8일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이재명 정부 출범 후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제기된 ‘친중 성향’에 대한 의구심과, ‘쿠팡 사태’ 및 대미 투자 지연 등이 이어지면서 한미 간 ‘동맹의 신뢰’가 떨어지고 ‘거래주의적 외교’만 남았다고 보기도 한다.
국가정보원을 둘러싼 한미 관계 ‘균열’ 의혹은 지난 6일 처음 제기됐다. 한 국내 매체가 미국이 쿠팡 사태 등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정부가 미국에 파견하려던 국정원 직원들의 비자 발급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보도하면서다.
국정원은 이를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으나, 이후 이 원장의 미국 방문도 거부됐다거나, 이 원장과 미국 정보기관 수장과의 만남에 미국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특히 조선일보는 이날 이 원장이 지난 3월 대북 정보 분석을 담당하는 미국 국가지리정보국(NGA) 방문과 정보기관 수장 면담을 추진했으나 일정 조율이 이뤄지지 않아 방미가 무산됐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다.
국정원은 이 같은 보도 내용이 전부 사실이 아닌 ‘허위 보도’이며, 이러한 허위 보도가 한미동맹을 훼손하고 국익에 해를 끼치는 행위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일시적일 수는 있어도, 한미의 정보 당국이 ‘원활한 소통’을 하지 못했다는 정황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동아일보는 지난 6월 말 북한의 사이버 위협 대응을 위한 한미일 실무그룹 회의 때 미국이 국정원의 참석을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국정원은 이에 대해서는 “수개월 전 일부 오해가 있었으나, 이미 지난 일”이라며 실제 미국 측의 ‘불편한 입장’이 표출된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외교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선 한미, 한미일 당국 간 관계가 아무리 수월하지 않아도 정보 당국 간 소통마저 일방적으로 거부하거나 차단한 것을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보고 있다. 미국이 지난 3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북한의 구성 핵시설’ 관련 발언 때 ‘기밀 유출’을 문제 삼아 일부 대북 정보 공유를 중단했음에도, 북한의 핵·미사일 관련 한미의 실시간 공동 대응이 필요한 정보는 차질 없이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정보기관 간 소통의 방식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트럼프 2기 행정부가 1기보다 더욱 ‘반중 성향’이 짙다는 평가를 기반으로,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많은 역량을 투입한 이재명 정부의 성향을 근본적으로 의심해 정보 당국 간 긴밀한 소통에 회의적이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관계가 개선되는 한중 정보 당국의 소통을 ‘불신’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올해 초부터 한미 간 갈등 현안이 된 쿠팡 사태와 대미 투자 문제로 인한 미국의 불만이 ‘전방위적’으로 표출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쿠팡 사태 초기 국정원의 ‘개입’ 의혹이 불거진 것을 미국 측에서 심각한 문제로 봤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국정원에 대한 ‘보복 조치’를 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쿠팡 측은 국정원 요원이 직접 중국으로 유출된 노트북 등의 회수를 ‘지시 혹은 명령’했다는 입장이며, 이는 미 하원 법사위원회가 지난 7월 공개한 중간보고서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대미 투자 1차 프로젝트 확정이 미국이 원하는 시점보다 크게 늦어지자, 미국 측이 핵추진잠수함 도입과 원자력 협정 개정을 위한 협의를 ‘보이콧’함은 물론, 한국에 대해 가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의 압박 혹은 보복 조치를 가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정원은 이날 입장문에서 ‘허위 보도’에 대한 강력한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도 “국가 간 정보 협력은 고도의 보안 사안으로 “사실이 아니다” 외에 구체적인 해명을 내놓기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또 “국제사회에서 정보기관 간의 교류·협력 활동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비공개·비밀 유지가 불문율이자 비공개 합의이며, 이 원칙을 어길 때 정보기관의 신뢰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두고 올해 상반기에 발생한 한미 정보 당국 간 불협화음이 대미 투자 확정 등으로 해소돼 국정원이 강한 부정의 입장을 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 들어 통상과 안보, 사실상 한미의 모든 현안을 엮어 ‘패키지’ 거래 대상으로 삼는 미국의 압박 외교가 심화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실제 쿠팡 사태 및 대미 투자 ‘지연’ 문제가 지속되는 동안 한국의 ‘숙원사업’인 핵추진잠수함 도입과 원자력 협력 개정이라는 안보협의엔 완전히 손을 놓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10월 한미 정상회담에서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올해 1월부터 열릴 예정이던 안보협의는 지난 6월에 단 한 차례 열렸을 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아무리 소통이 원활해도 크게 떨어진 신뢰를 복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안보 협력마저 경제적 양보를 얻어내는 지렛대가 된다면, ‘유사시 공동 대응’이라는 기본적인 신뢰 관계 유지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뉴스1과의 통화에서 매끄럽지 못한 한미 간 분위기에 대해 한국의 정보 보안에 대한 미국의 불신과, 해소되지 않은 한미 간 갈등이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을 짚었다. 그러면서 “통상에서 걸리는 문제가 안보 측면과도 다 연계가 되니까 우리가 이중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갈등의 중심에 한국이 ‘투자 약속’을 미루고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점심을 사면 곧바로 같은 금액의 저녁을 돌려받으려는 식’의 거래를 추구한다고 짚었다. 투자 사업의 검토와 집행에 필요한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즉각적인 대가를 요구하면서 양국 간 마찰을 키운다는 설명이다.
당장은 한미의 불협화음을 빠르게 해소하기가 쉽진 않아 보인다. 미국은 대미 투자 1차 프로젝트 합의 과정에서도 한국과 합의되지 않은 2차, 3차 사업의 구체적 내용을 확정된 사안처럼 발표하면서도 정작 안보협의 재개 일정 조율엔 적극적이지 않는 등, 자국 중심적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정부의 대응 방안으로는 이미 합의한 투자 사업을 이행하며 얽힌 현안을 하나씩 풀어가야 한다는 ‘현실적’ 제언 외에 뾰족한 답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협력을 지연한다는 인상을 피하면서도 사업의 경제성과 집행에 필요한 시간을 미국에 구체적으로 설명해, 단기 성과를 요구하는 압박 속에서 한국의 경제적 이익을 지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현안별, 이슈별로 자꾸 나눠서 생각하는 접근법도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조선업 등에서의 협력과 쿠팡 등 개별 사안의 갈등을 구분해 대응할 수 있도록 정부 간 접촉뿐 아니라 대미 의회 외교와 인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한국의 입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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