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완성차 시장이 두 진영으로 쪼개지고 있다. ‘유연성’을 택한 기업은 하이브리드 호황으로 웃고, ‘속도전’을 택한 기업은 막대한 손실과 모델 철수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카스쿱스(Carscoops)·오토블로그(Autoblog) 등 복수의 자동차 전문 매체가 최근 잇따라 보도한 ‘완성차 EV 전략 성적표’에 따르면, 그 격차는 수치로 이미 증명됐다. 폭스바겐은 미국 내 전기차 판매 부진으로 인한 재고 처분과 수익성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미국 사업 부문에서만 약 5억 유로(약 8673억 원) 규모의 손상 처리를 단행했다.
토요타, 하이브리드로 미국 점유율 싹쓸이… 전동화 비중 47% 돌파
토요타의 판단이 옳았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업계는 토요타를 ‘뒤처지는 거북이’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2025년 결산표가 공개되자 분위기가 역전됐다.
토요타는 2025년 미국에서 전동화 차량(하이브리드·플러그인 하이브리드·전기차 포함) 118만 3248대를 판매했다. 전년 대비 17.6% 증가한 수치이며, 토요타 전체 미국 판매의 47%에 달한다(오토블로그, 2026년 1월). RAV4·타코마·그랜드 하이랜더·코롤라 크로스 등 하이브리드 전 모델이 역대 최고 판매 기록을 경신했다. 타코마 픽업트럭은 판매량이 전년보다 40% 이상 급증했고, 그랜드 하이랜더는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유럽에서도 전선은 같다. 토요타는 올해 1분기 유럽에서 31만 8103대를 팔았으며 전동화 비중이 86%까지 치솟았다. 배터리 전기차(BEV) 판매만 전년 동기 대비 79% 늘었다(토요타 모터 유럽, 2026년 4월). 토요타는 올해 말 미국 시장에 ‘bZ 시리즈’ 등 4종의 전기차 모델을 추가 투입하며 수요 회복 국면을 정조준한다.
핵심은 ‘다각화’다. 토요타 미국 법인 수석부사장 데이비드 크라이스트(David Christ)는 “소비자들은 배터리 충전 마찰 없이 연비를 챙기는 중간 지점을 원한다”며 하이브리드가 그 정확한 답이라고 밝혔다(그린카스, 2025년 12월).
현대차·기아, 하이브리드 500만 대 돌파… 미국서 역대 최대 실적
현대차·기아도 하이브리드 전략의 과실을 수확하는 중이다.
현대차는 2025년 글로벌 시장에서 하이브리드차 63만 4990대를 포함해 친환경차 96만 1812대를 판매했다. 전년 대비 27.0% 증가한 역대 최고치다(현대차그룹, 2026년 1월). 기아도 마찬가지다. 2025년 연간 하이브리드 판매가 45만 4000대로 전년 대비 23.7% 증가했고, 4분기만 따로 보면 하이브리드가 12만 1000대로 전년 동기 대비 21.3% 뛰었다(기아, 2026년 1월). 양사 합산 미국 판매는 183만 6172대로 진출 이래 최고 기록을 썼다.
특히 의미 있는 지표는 현대차·기아 하이브리드 누적 판매 ‘500만 대 돌파’다. 토요타를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유일한 기록이다(에콘밍글, 2026년 3월). 2026년 2월 현대차의 미국 하이브리드 판매는 전년 동월 대비 73.5% 급증한 1만 8374대, 기아도 34% 늘어 양사 합산 2만 9279대(+56.4%)를 기록했다. 반면 같은 기간 양사 전기차 판매는 각각 감소했다. 소비자 선택이 하이브리드로 집중되고 있다는 명확한 신호다.
다만 현대차의 2025년 영업이익은 미국 관세 충격과 글로벌 인센티브 증가로 전년 대비 19.5% 감소한 11조 4679억 원에 그쳤다. 하이브리드 선전이 관세 리스크를 완전히 상쇄하기엔 역부족이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반론이다.
폭스바겐, ID.4 미국 생산 전면 중단… 1분기 판매 95.6% 폭락
전기차 ‘올인’ 전략의 대가는 폭스바겐이 가장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폭스바겐은 지난달 테네시주 채터누가 공장에서 미국 내 유일 생산 전기차인 ID.4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공식 중단 시점은 2026년 4월 중순이다(오토블로그, 카스쿱스, 2026년 4월). 이유는 수치가 설명한다. ID.4의 2026년 1분기 미국 판매량은 338대로, 전년 동기 대비 95.6% 폭락했다(카스쿱스, 2026년 4월). 연방 전기차 세액공제(7500달러, 약 1100만 원)) 폐지 이후 수요가 사실상 증발한 결과다.
ID.4의 미국 최대 판매는 2023년 3만 7789대였다. 이후 2024년에는 55% 급감했고, 2025년은 세액공제 종료 전 막판 수요로 31% 반등해 2만 2373대를 기록했으나, 2026년 1분기에 다시 절벽에서 추락했다(켈리 블루북, 2026년 4월). 분석가 스티븐 레이트먼(Stephen Reitman)은 “폭스바겐이 이 수익성 없는 차량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득”이라고 진단했다. 폭스바겐은 미국 사업 관련 약 5억 유로(약 8673억 원)를 손상 처리했다(일렉트라이브, 2026년 4월).
채터누가 공장은 앞으로 내연기관 SUV인 2027년형 아틀라스(Atlas) 신형 생산에 집중한다. 전기차 투자를 위해 플랫폼 전환에 쏟은 4년이 완전히 회수되지 못한 채 내연기관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이브리드 시장 3120억 달러… “완충재 아닌 주류”
시장 규모가 전략의 정답을 검증하고 있다.
2025년 기준 글로벌 하이브리드 시장 규모는 약 3120억 달러(약 459조 원)에 달하며 연평균 7% 이상 성장 중이다(프레시던스 리서치, 2026년). 하이브리드 점유율은 연간 13% 수준까지 확대됐다(PwC, 2026년). 반면 미국 전기차 시장 성장률은 에드먼즈(Edmunds) 전망 기준 2026년 6%대로 둔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2025년 7.4%에서 뒷걸음질하는 수치다(엔키AI, 2026년 4월).
에드먼즈는 “전기차 시장은 가격 상승과 수요 불확실성이라는 이중고를 동시에 겪고 있다”며 “현금 흐름이 탄탄한 기업은 투자를 지속하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은 생존을 위해 프로젝트를 폐기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포드와 GM도 ‘철수’가 아닌 ‘속도 조절’에 방점을 찍고 있다. GM은 전기차 라인업 축소와 함께 하이브리드 비중을 확대 중이다. 혼다도 차세대 전기차 모델을 대거 취소하고 2026년 하이브리드 중심 전략으로 회귀했다(워즈오토, 2025년 11월).
투자자·소비자가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할 3가지 지표
첫째, ‘하이브리드 매출 비중’이다. 토요타(전체 판매의 47%)·현대차(글로벌 전체 판매 대비 하이브리드 비중 약 15.3%)처럼 하이브리드 수익이 전기차 손실을 상쇄하는 구조를 갖춘 기업이 시장 변동성을 버텨낸다.
둘째, ‘연방 보조금 의존도’다. 폭스바겐 ID.4 사례는 세액공제 폐지 한 방에 수요가 95%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정부 인센티브 없이도 자생적 수요를 확보한 모델인지 따져봐야 한다.
셋째, ‘생산 유연성’이다. 전기차와 내연기관·하이브리드를 같은 라인에서 혼류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보유한 기업이 수요 급변에 즉각 대응할 수 있다. 채터누가 공장처럼 전기차 전용으로 개조했다가 다시 내연기관으로 돌아가는 비용은 고스란히 손실로 남는다.
전기차 성장 둔화가 일시적인 ‘캐즘’인지, 구조적 변화인지에 대해선 업계 의견이 엇갈린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확정됐다. 완성차 기업에게 ‘속도전’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하이브리드라는 징검다리를 얼마나 촘촘히 깔아놓느냐가 향후 5년, 기업의 생존을 가르는 유일한 지표로 부상했다.